병 693기 1대대 3중대 1소대 훈련병번호 1번부터 12번 |
2013-08-30
20100830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정확히 오늘. 나는 군입대를 했다. 하늘을 나는 가장 높은 힘. 대한민국 공군 병 693기로. 입대할 때와 지금이 다른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니, 몸무게는 그때가 훨씬 많이 나갔던거 같고, 마음가짐? 그래. 마음가짐이 달라졌구나. 더욱 나태와 게으름을 즐기게 되었고, 효? 머릿속에는 충만하지만 몸으로 실천을 안하고 있고, 더군다나 그 당시에는 흡연에 있어서 저리가면 서러울정도로 담배를 증오하였는데...지금은 담배를 태우고, 그리고 그 담배에 내가 물리는 느낌이고. 참. 그렇네. 그래도 그래도. 다시금 시작하면 되는 것 아니겠나? 참 알쏭달쏭하고 기묘한 인생이야. 이 노래나 듣자. 아 그리고 같이 훈련받았던 내 동기들은 지금쯤 뭣들 하고 있을까? 연락이 잘 안되지만. 뭐 몇명은 부대에서 조금씩은 했는데 부사관이 된 녀석도 있었고, 그냥 나처럼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 녀석들도 있을테고, 그 당시 30살이었던 형님은 지금 잘 계시나 꽤나 궁금한데. 자대가면 연락 꼬옥! 하자고 그랬는데, 결국은 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이 되었군. 쳇. 오늘이라도 해야지 늦지않았으니 말이야. peace!
2013-08-23
『페북허세7』
절기로 처서인 오늘 말그대로 밤에는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여름내내 지루함과 옹색함으로 눈을 부스스비비며 일어났다. 마지못해 부모에게 투정부리고 터덜터덜 집밖으로 나와 담배 한 대를 문다. 그리고 푸르디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그리고 내뱉는다. '시발, 역겨운 하루가 또 시작이군.' 무더위에 지쳐버린 나의 심신과 정신은 이미 이 세상을 뜬지 오래다. 그동안 너무 더웠다. 태양은 하늘 끝에서서 마지막 발악하는데 나에게는 치졸하게 발악조차할 열정도 없었다. 정력(?)따윈...시발. 그렇게 여름이 갔다. 여름이 갔다. 여름이 갔다. 그리고 다가온다. 가을이. 가을이 오면 좀 달라질까. 그러면 더워서 열정이 없었다는 것은 핑계로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그런 핑계조차 그리웁다.
- 박정우,『페북허세7』
멍청함(stupid)
요즘들어 심히 멍청해진 느낌이다. 이 멍청해졌다는 것은 다분히 현실의 행동에서 뿐만아니라, 생각마저 둔해졌다는 의미이다. 진짜 생각이 나지않는다. 재기발랄했던 상상력도 전혀 동원되지 않는다. 답답하다. 왜. 왜. 왜.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는 그 힘 자체가 매우 뒤쳐져있는 느낌이다. 예전에는 무언가 글을 쓰고 나면 만족하는 느낌이 있었지만, 요새는 전혀 그렇치 못하다. 답답하다. 답답하다. 왜 고통과 시련은 한 번에 밀려오는 것일까. 숨 막힌다. 젠장. 역겹다. i'm not a boy, i'm not a gentleman. just stupid. disgust life.
2013-08-22
가자, 장미여관으로! - 마광수
가자, 장미여관으로 초판 표지 |
'장미여관'은 내 상상 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여관이다. 장미여관은 내게 있어 두 가지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나그네의 여정(旅程)과 향수를 느끼게 해주는 여관이다. 우리는 잡다한 현실을 떠나 어디론가 홀가분하게 탈출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살아간다. 나의 정체를 숨긴 채 일시적으로나마 모든 체면과 윤리와 의무들로부터 해방되어 안주하고 싶은 곳 - 그곳이 바로 장미여관이다. 또 다른 하나는 '러브 호텔'로서의 장미여관, 붉은 네온사인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곳, 비밀스런 사랑의 전율이 꿈틀대는 도시인의 휴식공간이다.
우리는 진정한 안식처를 직장이나 가정에서 구할 수 없다. 직장의 분위기는 위선적 체면치레와 복잡한 인간관계가 얽혀 우리를 숨막히게 한다. 가정은 겉보기엔 단란하지만 사실상 갖가지 컴플렉스들이 럭혀서 꿈틀대는 고뇌의 장(場)이다. 가족관계란 싫든 좋든 평생 묶여서 지내야 하는 굴레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우리는 잠깐만이라도 모든 세속적 윤리와 도덕을 초월하여 어디론가 도피함으로써 자유를 호흡할 수 있어야 한다. 장미여관 - 그 달콤한 음탕과 불안한 관능이 숨쉬는 곳, 거기서 우리는 비로서 자연의 질서와 억압에 저항하는 '관능적 상상력'과 '변태적 욕구'를 감질나게나마 충족시킬 수 있고, 우리의 일탈욕구(逸脫欲求)를 위안받을 수 있다.
이 시집의 표제로 삼은 <가자, 장미여관으로!>를 쓴 1985년 여름을 전후하여 내 시 스타일은 많이 바뀌었다. 그 이전까지는 유미적 쾌락에의 욕구와 현실상황에 대한 고뇌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는' 식의 내용이 많았다. 여인의 긴 손톱은 섹시하다. 그러나 그런 손톱은 '민중적 손톱'은 아니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나는 공연히 '민중적 고뇌'로 괴로워하는 척하면서 지식인의 명예욕을 충족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초기작에서는 치열한 고뇌와 갈등이 엿보이는데 요즘 작품은 너무 퇴폐적으로 흐르고 있다고 지적해주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오히려 나로서는 그 '치열한 고뇌의 정신'이 부끄럽고 창피하게만 느껴진다. 말하자면 나는 솔직하게 발가벗지 못하고 그저 엉거주춤 발가벗는 척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나는 그런 지식인의 위선을 떨쳐 버리기로 결심하였다. 아무런 단서나 변명 없이도, 여인의 긴 손톱은 아름답고 야한 여자의 고혹적인 관능미는 나의 상상력을 활기차게 한다. 모든 사람들은 다 민중으로 만들 것이 아니라 다 귀족으로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귀족들만이 누렸던 감미로운 사치와 쾌락을 맛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요즘의 내 생각이다. 사람들은 모두 '진정한 쾌락'을 위해서 산다. 지배계급에 대한 적의(敵意)는 쾌락에 대한 선망일 뿐, 숭고한 평등의식의 소산은 아니다.
누구나 잘사는 사회, 누구나 스스로의 야한 아름다움을 나르시시즘으로 즐길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만 한다. 일을 안해 '희고 고운 손'을 질투한 나머지 모든 여성의 손을 '거칠고 못이 박힌 손'으로 만들어 버리자고 신경질적으로 주장해서는 안된다. 모든 여성의 손을 다 '길게 손톱을 기른 화사한 손'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 아니라 괴로운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괴로운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즐거운 노동', 이를 테면 화장이나 손톱기르기 등을 통해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노동에서 진짜 관능적 쾌감을 얻을 수 있도록 구체적인 해결책을 모색해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유미주의에 바탕을 둔 쾌락주의, 또는 복지지상주의(福祉至上主義)가 요즘의 내 신조라면 신조라고 할 수 있다.
즐거운 권태와 감미로운 퇴폐미의 결합을 통한 관능적 상상력의 확장은 우리의 사고를 보다 자유롭고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인류의 역사는 상상을 현실화시키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꿈이 없는 현실은 무의미한 것이고 꿈과 현실은 분리되지 않는다. 꿈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적 실천을 가능케해주는 원동력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시에서의 상상이 설사 '생산적 상상'이 아니라 '변태적 공상'이 된다 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시는 꿈이요, 호나상이요, 상상의 카타르시스이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하는 행위조차 윤리나 도덕의 간섭을 받아야 한다면 우리의 삶은 정말로 초라하고 무기력해지고 말 것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시를 통해서 사라으이 배고픔과 새디스틱한 본능들을 대리배설시키고, 또 그럼으로써 격노하는 본능과 위압적인 양심 사이에 평화로운 타협을 이루고 싶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여 현실 속의 나는 여전히 외롭다, 외롭다. 진짜 관능적인 사랑, 진짜 순수하게 육체적인 사랑, 모든 이데올로기적 선입관과 도덕적 위선을 떨쳐 버리고 솔직하게 발가벗을 수 있는 사랑이 내 앞에 펼쳐지기를 나는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 누가 나의 이 허기증을 달래 줄 수 있을는지? 그 어느 날에나 나는 상상 속의 장미여관이 아니라 진짜 현실 가운데 존재하는 장미여관에 포근하게 정착할 수 있을는지?
1989년 4월 마광수 (책 머리에)
광마선생을 누가 퇴폐적이라고 이야기했던가, 그의 생각만은 지극히 고고하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순수하다. 위의 서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도덕적 위선과 억압을 꿈 속에서나마 벗어던지고 싶어하는 순수한 청년이다. 그러나 우리는 도덕적 위선과 억압들을 꿈속에서 조차 당하고 있다. 이 얼마나 자유롭지 못하단 말인가. 그 어떠한 문학가가 이보다 솔직할 수 있으리오. 표현의 자유조차 이 땅에는 없다는 말인가. 그에 대해서 비판은 가능치만 비난은 하지말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우리는 정확히 모르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광마의 시 중 '가자, 장미여관으로!'가 작성된 시기를 전후로 한 시 2편을 읽어보자. 초기작에서 그는 치열한 고뇌와 갈등에 관한 작품들을 여러 선보였는데, 이것이 작가 스스로에게 창피함을 주었다면, 당연히 그러하다면 위선따윈 떨쳐버리고 순수한 '나'로 돌아가는 작업이 옳다고 생각한다. 순수해지자. 눈치보지말며.
가자, 장미여관으로! (1985)
만나서 이빨만 까기는 싫어
점잖은 척 뜸들이며 썰풀기는 더욱 싫어
러브 이즈 터치
러브 이즈 휠링
가자, 장미여관으로!
화사한 레스토랑에서 어색하게 쌍칼 놀리긴 싫어
없는 돈에 콜택시, 의젓한 드라이브는 싫어
사랑은 순간으로 와서 영원이 되는 것
난 말없는 보디 랭귀지가 제일 좋아
가자, 장미여관으로!
철학, 인생, 종교가 어쩌구저쩌구
세계의 운명이 자기 운명인 양 걱정하는체 주절주절
커핀은 초이스 심포니는 카라얀
나는 뽀뽀하고 싶어 죽겠는데, 오 그녀는 토론만 하자고 하네
가자, 장미여관으로!
블루스도 싫어 디스코는 더욱 싫어
난 네 발냄새를 맡고 싶어, 그 고린내에 취하고 싶어
네 치렁치렁 긴 머리를 빗질해 주고도 싶어
네 뾰족한 손톱마다 색색 가지 매니큐어를 발라 주고도 싶어
가자, 장미여관으로!
러브 이즈 터칭
러브 이즈 휠링
자유에 (1973)
우리들은 죽어가고 있는가, 우리들은 살아나고 있는가. 우리들의 목숨은 자라나는 돌덩이인가, 꺼져가는 꿈인가. 현실의 삶은 죽어가는 빛인가, 현실의 죽음은 뻗어가는 빛인가.
광마 마광수 |
2013-08-19
무진기행 - 김승옥
현재까지의 인생을 살면서 횟수로 치면 가장 많이 읽은 소설이지 싶다. '무진기행'.
무진기행에 관해서 하고픈 말은 무척이나 많다. 이 글을 통해서 레포트도 작성도 해보았고, 아마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라는 작품과 연계를 해서 나름의 해석을 했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는 바르트의 생전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스투디움'이라는 개념과 '푼크툼'이라는 개념을 설명해 주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 스투디움 : 사진에서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스토리, 즉 눈에 보이는 직접적인 무언가
- 푼크툼 : 한 장의 사진을 다른 사진이 아닌, 바로 그 사진, 그 자체로 만드는 것은 무의식의 에너지를 집약하고 있는 무언가
이다. 이 개념을 바탕으로 소설 '무진기행'에 관해서 논했던 적이 있다. 즉 무진기행에서 내가 직접적으로 읽은 구절들, 눈으로 직접적으로 관찰한 글자들은 '스투디움'이고 그 안에 그 문장이게끔 하는 뭔가의 아우라(?)라고 할까. 그것을 느끼게 해준 것이 '푼크툼'이다. 사실 이 '무진기행'이라는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푼크툼'의 개념으로 뒤덮혀 있었음을 느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모든 문장 하나하나가 주옥같았다. 개 중의 굳이 뽑자면 아마도 마지막 구절이었지.
- 그러나 나는 돌아서서 전보의 눈을 피하여 편지를 썼다. ‘갑자기 떠나게 되었습니다. 찾아가서 말로써 오늘 제가 먼저 가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만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것입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저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다 놓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듯 이 당신을 햇볕 속으로 끌어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그리고 서울에서 준비가 되는대로 소식을 드리면 당신은 무진을 떠나서 제게 와주십시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쓰고 나서 나는 그 편지를 읽어봤다. 또 한 번 읽어봤다. 그리고 찢어버렸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서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 무진에서 만큼은 솔직하게 하인숙에게 마음을 전하는 편지를 썼고 이에 어떻게 행동하겠다는 다짐까지도 적어 내려갔다. 그러나 그것은 무진을 떠나면서 모두 의미가 없어진다. 결국 서울로 돌아간다. 이는 현실로 돌아감을 뜻하고 꿈에서 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인숙을 원하고 함께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현실이 깨우쳐주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실에 대하여 받아들이고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에서 그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부끄러움 안에는 수많은 감정의 복잡함이 내재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러니를 발생시킨다. 사랑을 하나 실현될 수 없는 사랑, 마음을 전하고자 하였으나 결국에는 전하지 못함으로 귀결된다.
간결한 문체와 사람의 감수성을 뒤범벅 시켜놓는 천재 청년 작가였던 김승옥. 주옥같은 문장을 쓰던 그는 어디로 갔을까. 그는 지금 종교로의 귀의이후 뚜렷한 행적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립다. 그가 일필휘지로 글을 쓰던 그 모든 것이.
2013-08-14
까르보나라
왠지모르게 오늘은 너의 그 느끼함이 그리웠어. 그리고 너를 만났고, 오랜만에 만나서 나는 신이 났었지. 그리고 너를 먹었지. 너의 크림소스가 나의 식도와 일치를 이루는 순간 이미 나는 온몸으로 전율을 느꼈지. 원래 잘 먹지않는 스파게티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너와 함께라 정말 행복했어. 그래서 내일은 운동을 할거야. 그래도 고마워. 지금 또 그리워졌는걸. 너가 보고싶은걸. 다음을 기약할게. 안녕!
2013-08-11
8월 11일
1969년_다이애나 로스, 잭스 5를 소개한다
1969년 8월 11일, 다이애나 로스는 LA의 베버리 힐스에 있는 한 클럽에 손님들을 초대했다. 가수가 사람을 모았으니 공연이 펼쳐진 것은 당연. 하지만 이날 다이애나 로스가 사람을 모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다이애나 로스는 자신의 공연을 펼치기에 앞서 오프닝 무대에 한 신인 그룹을 소개했다. 앞으로 모타운을 대표할 그룹이 될 것이라고 소개된 이그룹의 이름이 바로 잭슨 5(Jackson 5)였다.
그해 12월, 잭슨 5의 데뷔 앨범이 발매되었다. 앨범의 제목은 「Diana Ross Presents The Jackson 5」.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잭슨 5의 데뷔는 다이애나 로스의 적극적인 후원 속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다이애나 로스의 판든은 옳았다. 잭슨 5는 데뷔와 동시에 <I want you back>, <ABC>, <I found that girl>, <I'll be there>, <Who's loving you>등의 히트곡들을 잇달아 터뜨리며 모타운을 대표하는 인기 그룹으로 성장해갔던 것이다.
잭슨가의 다섯 형제로 이루어진 형제 그룹 잭슨 5의 막내가 바로 1980년대 팝의 황제가 될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이었다.
그해 12월, 잭슨 5의 데뷔 앨범이 발매되었다. 앨범의 제목은 「Diana Ross Presents The Jackson 5」.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잭슨 5의 데뷔는 다이애나 로스의 적극적인 후원 속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다이애나 로스의 판든은 옳았다. 잭슨 5는 데뷔와 동시에 <I want you back>, <ABC>, <I found that girl>, <I'll be there>, <Who's loving you>등의 히트곡들을 잇달아 터뜨리며 모타운을 대표하는 인기 그룹으로 성장해갔던 것이다.
잭슨가의 다섯 형제로 이루어진 형제 그룹 잭슨 5의 막내가 바로 1980년대 팝의 황제가 될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이었다.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잭슨 5 |
마이클 잭슨 |
저 사진 속의 가운데 아이가 바로 훗날의 마이클 잭슨이다. 마이클 잭슨이 저 당당하게 서있는 모습을 봐라. 좌중을 압도하는 것은 물론 저 뒤에 시대를 풍미했던 수많은 가수들 앞에 위세등등하게 서있다. 그렇다. 저렇게 당당해야한다. 무엇이든 당당해야한다. 마치 이것은 정정당당 Korea라할까. 마이클 잭슨의 노래와 잭슨 5의 수많은 노래들을 여러분은 익히 들어왔을터. 오늘은 다이애나 로스의 노래를 한곡 들어봅시다! 어제와 오늘 모타운(Motown)에 대해서 계속해서 등장하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모타운은 최초의 아프리카 미국인이 세운 레이블로써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즉 흑인 예술가들을 위한 음악의 대표 레이블이다. 미국의 흑인 음악은 모타운이 키운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런 모타운이 위기에 처했었으니!
2013-08-10
갑을고시원체류기 - 박민규
집에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을 모으고 있는 나는 짐짓 이 책들을 거의 다 읽었지만, 2000년대 이후의 것에는 거의 읽지를 못하였다. 그리고 심심한 단편을 찾다 눈에 들어온 것이 2005년 이상문학상 수상집. 그냥 문득 박민규의 글이 보고싶었다. 문득. 아무런 생각도 없이.
대한민국의 20대는 70년대에는 독재와 싸우고, 80년대에는 군부정권과 투쟁하였다. 90년대이후의 20대들은 딱히 어떠한 뚜렷한 목적없이 나름의 착각 속에서 그저 아둥바둥 살아간다. 그냥 아둥바둥. 어쩌다보니 살게된다. 박민규는 특유의 풍자의 시각으로 90년대 초 우리가 현재에는 이미 기억 속에 파묻힌 잊고 살았던 한국 사회의 모든 병폐를 고시원 속에서 발견함을 그려낸다. 예컨대 고시에 내리 떨어지다가가 끝내 좌절하게되는 법대 출신 고시 지망생, 잡초처럼 살아가는 유흥업소 아가씨들, 그리고 그들에게 방을 빌려주어 생계를 꾸리는 주인아줌마 등. 또한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은 김승옥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의 그 주인공들과 유사한 모습이다. 이 소설에서 그들의 모습이 60년대의 군상을 나타낸다면 박민규는 90년대의 군상을 표현한 것이다.
어찌 되었건 대한민국의 고시원은 제 기능을 잃은지 오래이다. 그곳은 이미 빈곤층들의, 떠돌이들의 안식처가 된지 오래이다. 지금 우리내 청춘들의 모습도 90년대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저 아둥바둥 어쩌다보니 살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이리도 만든 것이냐. 비록 과거에 비해 열망의 크기는 적을지언정 민주화와 자유로의 열정은 아닐지언정 또다른 모습의 열정과 열망을 우리 함께 품어보자. 목적없는 아둥바둥 보다는 목적있는 아둥바둥 이냥저냥이 차라리 더 가치있을 수도 있으니까.
8월 10일
1963년_레코드 브레이커스, 리틀 스티비 원더
1963년 8월 10일자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오른 곡은 리틀 스티비 원더(Little Stevie Wonder)의 <Fingertips Part 2>였다. 후에 리틀을 떼고 그의 이름 다섯자를 팝 음악사에 찬연하게 아로새기게 되는 흑인 음악의 거장 스티비 원더의 첫 번째 빌보드 넘버원 곡이었다. 놀라운 것은 당시 시티비 원더의 나이 불과 열세 살에 불과했다는 사실(그는 1950년 5월 13일생)이다. 40년이 넘도록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는 최연소 빌보드 정상 등극의 신기록이다.
한편 <Fingertips Part 2>가 수록된 앨범 「The 12 Years Old Genius」도 당당히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올랐는데 이 앨범 또한 각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바로 모타운이 배출한 최초의 빌보드 넘버원 앨범이라는 사실. <Fingertips Part 2>는 한 가지 기록을 더 가지고 있는 데 그것은 이 곡이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른 최초의 라이브 싱글이었다는 사실이다.
기록은 깨지라고 있는 것이라는 말도 있듯이 스티비 원더가 기록한최연소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 정복의 기록은 그로부터 7년 후인 1970년에 깨졌다. 잭슨 파이브의 첫 번째 넘버원 싱글인 <I want you back>이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르던 1970년 1월 31일, 잭슨 파이브의 막내 마이클 잭슨의 나이 겨우 열한 살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그룹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내건 솔로로서만 본다면 스티비 원더의 신기록은 아직 유효하다. 1972년 10월 14일 역시 마이클 잭슨이 솔로로서는 첫 번째 넘버원 곡인 <Ben>을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올려놓던 날, 이미 세월은 흘러 마이클 잭슨의 나이도 어느덧 열네 살이었다.
한편 <Fingertips Part 2>가 수록된 앨범 「The 12 Years Old Genius」도 당당히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올랐는데 이 앨범 또한 각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바로 모타운이 배출한 최초의 빌보드 넘버원 앨범이라는 사실. <Fingertips Part 2>는 한 가지 기록을 더 가지고 있는 데 그것은 이 곡이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른 최초의 라이브 싱글이었다는 사실이다.
기록은 깨지라고 있는 것이라는 말도 있듯이 스티비 원더가 기록한최연소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 정복의 기록은 그로부터 7년 후인 1970년에 깨졌다. 잭슨 파이브의 첫 번째 넘버원 싱글인 <I want you back>이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르던 1970년 1월 31일, 잭슨 파이브의 막내 마이클 잭슨의 나이 겨우 열한 살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그룹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내건 솔로로서만 본다면 스티비 원더의 신기록은 아직 유효하다. 1972년 10월 14일 역시 마이클 잭슨이 솔로로서는 첫 번째 넘버원 곡인 <Ben>을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올려놓던 날, 이미 세월은 흘러 마이클 잭슨의 나이도 어느덧 열네 살이었다.
이 형님의 위대함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세계의 사람들이 알터. 맹인이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만큼은 인류최강급. 게다가 음악도 미쳤다. 우리가 살면서 무조건적으로다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확률이 100%. 그만큼 알겠지? 뭐 말이 필요없어. 진짜. 대! 박!
2013-08-09
8월 9일
1984년_아이언 메이든, 냉전의 벽을 뛰어넘다.
1984년 8월 9일, 록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가장 넓은 지역을 아우르며 펼쳐진 공연으로 기록되고 있는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의 역사적인 World Slavery Tour의 막이 올랐다.
1984년 8월 9일 시작되어 이듬해 7월 5일까지 거의 1년 가까이 진행된 이 역사적인 투어는 미국, 영국은 물론 독일, 캐나다, 프랑스, 스웨덴,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에서 일본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펼쳐졌는데 특히 이 투어가 각별하게 평가받는 이유는 위에서 말한 지역 외에도 폴란드와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등 동구권 국가들에서도 공연이 이루어짐으로써 서방의 헤비메탈 밴드가 동구권 국가에서 공연한 최초의 사례가 되었기 때문이다(록 밴드로는 1967년 롤링 스톤즈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공연한 적이 있었다).
주다스 프리스트와 함께 NWOBHM(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의 쌍두마차로 군림했던 아이언 메이든은 이들의 대표작인 「The Number Of The Beast」등의 명반과 함께 1980년대 헤비메탈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정상의 밴드이기도 하지만 또한 냉전의 시대였던 당시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동구권 투어의 신호탄을 올림으로써 음악을 통한 이념장벽 붕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던 주인공으로도 기억됨이 마땅하다.
그 역사적인 World Slavery Tour가 1984년 8월 9일, 폴란드에서 막이 올랐다. 1985년 발매된 라이브의 명반 「Live After Death」는 바로 그 World Slavery Tour의 하이라이트를 담은 앨범이다.
아이언 메이든 「Live After Death」 |
1984년 8월 9일 시작되어 이듬해 7월 5일까지 거의 1년 가까이 진행된 이 역사적인 투어는 미국, 영국은 물론 독일, 캐나다, 프랑스, 스웨덴,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에서 일본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펼쳐졌는데 특히 이 투어가 각별하게 평가받는 이유는 위에서 말한 지역 외에도 폴란드와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등 동구권 국가들에서도 공연이 이루어짐으로써 서방의 헤비메탈 밴드가 동구권 국가에서 공연한 최초의 사례가 되었기 때문이다(록 밴드로는 1967년 롤링 스톤즈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공연한 적이 있었다).
주다스 프리스트와 함께 NWOBHM(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의 쌍두마차로 군림했던 아이언 메이든은 이들의 대표작인 「The Number Of The Beast」등의 명반과 함께 1980년대 헤비메탈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정상의 밴드이기도 하지만 또한 냉전의 시대였던 당시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동구권 투어의 신호탄을 올림으로써 음악을 통한 이념장벽 붕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던 주인공으로도 기억됨이 마땅하다.
그 역사적인 World Slavery Tour가 1984년 8월 9일, 폴란드에서 막이 올랐다. 1985년 발매된 라이브의 명반 「Live After Death」는 바로 그 World Slavery Tour의 하이라이트를 담은 앨범이다.
그레이트풀 데드 「American Beauty」 |
그레이트풀 데드를 이끌었던 록의 거장 제리 가르시아(Jerry Garcia)가 1995년 8월 9일, 5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리고 그의 사망과 함께 그레이트풀 데드는 사실상 자연 소멸됐다. 제리 가르시아가 사망하자 미국 언론은 제도권 사회에 저항하는 마지막 밴드가 소멸했다고 애석해 했으며 특히 '뉴스위크'지는 '최후의 얼터너티브 밴드가 사라졌다'고 논평했다.
그레이트풀 데드 |
제리 가르시아 |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1. 우선 아이언 메이든에 대해서는 지난 8월 7일 브루스 디킨슨관련 글에서 조금은 언급한적이있다. 저 영상은 글에서 나와있는 것처럼 World Slavery Tour의 일부이며 그들은 노래곡처럼 Ace High였다. 역시 음악은 이념을 뛰어넘는 위대한 힘을 지닌 것이다. 그들에게 열광하는 저 동구권 사람들의 모습을 보라. 그들은 구 소련의 억압과 구속을 아이언 메이든의 노래를 듣고 해방감으로 승화시킨 것임이 분명하다.
2. 그레이트풀 데드는 사실 나도 잘 알지 못하는 밴드이다. 그러나 그들의 음악에는 적나라한 포크와 컨트리 그리고 미국인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정서가 들어가있는 것 같다. 마치 우리음악에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미국인들 또한 그들의 노래를 듣고 가장 미국적인 밴드를 잃었다는 것을 개탄한 것은 크게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크레용팝 '빠빠빠'에 관한 고찰
크레용팝 |
크레용팝의 '빠빠빠'는 초창기 누구에게나 외면당할 수 있는 소위 '병맛'이란 이미지로 다가온 것이 사실이다. 주위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영상을 보여주면 최악이라고 모두들 일관된 태도를 보이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것은 싸이 1집 이후에 우리 문화계의 일대의 충격을 가져다 주기 충분하였다. 싸이의 1집의 타이틀곡 '새'는 그 당시 대한민국의 다수의 평론가들은 회의적인 태도를 견지하였고, '이건 노래가 아니다', '장난하냐'라는 등 쓰디쓴 말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싸이를 생각해보아라. '새'가 없었다면 지금의 싸이도 없었을 것이다.
크레용팝의 빠빠빠는 역사, 사회, 문화, 생명력, 추억 등 여타 모든 면에 대하여 우리가 중요시 깊이 있게 생각해야하는 부분들을 건드리고 있다. 맨 처음 그들을 본 느낌은 어떠한가. 마치 어린시절 우리가 보았던 5인 영웅물들 영화(후뢰시맨, 바이오맨, 마스크맨 등)들이 생각나지 않던가.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하나뿐인 지구를 수호하고자 악과 투쟁하는 모습을 '간지와 뽀대'를 혼합하여 나타낸다. 그들의 모습과 크레용팝은 흡사하다. 크레용팝 또한 사회의 어떠한 악과 투쟁하여 지구를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이것이 그들의 기본적인 컨셉트로 잡혔음이 틀림없다. 또한 그들의 개다리춤은 한국 코미디계의 대부이신 故 배삼룡 선생님의 춤으로써 그것을 답습함으로써 전통과 관습의 명맥을 유지코자 하는 의지를 나타낸다. 이는 또한 한국 코미디계의 수장이셨던 고인에 대한 예의와 존경을 표현하였음이 분명하다. 소위 '직렬 5기통' 춤이라고 불리우는 이 댄스는 그들의 안무에서 백미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아두무'라고 불리우는 케냐의 전통 원시민족인 마사이족의 춤과 유사하다. 마사이족은 수직으로 점프를 함으로써 그들의 용맹함을 뽐내며 타부족에게 위협감을 준다. 이는 원시부족으로부터 생명력과 '살아있음'이라는 기제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현재의 수없이 일어나는 살인과 자살에 대한, 즉 생명을 괄시여기는 현 세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또한 하늘을 '콕콕' 찌르는 동작에서는 마치 BEE GEES의 음악으로 뒤덮혀진 존 트라볼타 주연의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가 생각나게 한다. 한 시대를 풍미한 디스코의 동작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현재 50,60대 어른들에게는 과거 디스코를 췄던 그들에게 진한 향수를 불리운다. 이는 청춘에 대한 과거 회상의 역할일 것이다. 그들에게 추억을 선물코자 한 것이다. 이 외에도 독일의 '나치' 경례를 연상시키는 안무와 소위 남자의 영원한 만화영화인 '드래곤 볼'의 에네르기파를 연상시키는 안무는 과거 세계대전에서의 독일의 역할에 대하여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드래곤 볼에서 백날 에네르키 파를 쏴대던 손오공보다는 진정한 상남자의 간지는 베지터임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누가 더 짧은 치마를 입나, 누가 더 섹시한가를 운운하는 것에 대하여 지겨움을 느꼈던 이들이라면 이들을 보라. 현직 alive한 20대 아가씨들의 놀랄만한 교복치마와 체육복 바지 걸쳐입기 패션에 머리에 헬맷.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것이 오히려 더욱더 잘 어울리는 그러한 모습이다. 모르고 살면 그냥 지나칠 일이지만, 이미 그들을 알아버린 이상 우리는 그들을 쉽게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2013-08-08
『페북허세 6』
8월 8일
1960년_운율이 척척 맞는
<Itsy bitsy~>빌보드 넘버원
시에 운율이 있듯이 노래의 가사에도 대구의 글자 숫자나 어미 처리에 있어서 일정한 규칙이 있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힙합에서 말하는 라임이라는 것도 일종의 운율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올드 팝 중에서 운율이 가장 뛰어난 곡을 꼽는다면 제목부터 구절이 척척 들어맞는 브라이언 하일랜드(Brian Hyland)의 <Itsy bitsy teenie weenie yellow polka dot vikini>가 아닐까 싶다. 브라이언 하일랜드의 <Itsy bitsy teenie weenie yellow polka dot vikini>가 1960년 8월 8일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올랐다.
혹시 제목이 너무 길어서 외울 수가 없다고 불만이라면 두 단어씩 끊어서 읽고 그렇게 외워보라. 그러면 쉽다. <Itsy bitsy / teenie weenie / yellow polka / dot vikini>.
이밖에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브라이언 하일랜드의 노래라면 아마도 <Sealed with a kiss>가 아닐런지
혹시 제목이 너무 길어서 외울 수가 없다고 불만이라면 두 단어씩 끊어서 읽고 그렇게 외워보라. 그러면 쉽다. <Itsy bitsy / teenie weenie / yellow polka / dot vikini>.
이밖에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브라이언 하일랜드의 노래라면 아마도 <Sealed with a kiss>가 아닐런지
2013-08-07
8월 7일
1958년_아이언 메이든의 개성파,
보컬리스트 브루스 디킨스 출생
보컬리스트 브루스 디킨스 출생
1980년대 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을 주도했던 그룹은 주다스 프리스트, 데프 레파드 그리고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이었다. 그중에서도 선봉이라면 어렵긴 하지만 아이언 메이든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앨범 재킷마다 등장하던 '에디'라는 독특한 캐릭터와 함께 헤비메탈 씬을 강타했던 아이언 메이든 ㅈㄴ력의 절반은 단연 보컬리스트 브루스 디킨스(Bruce Dickinson)이었다. 브루스 디킨슨은 1958년 8월 7일, 영국 북부의 광산촌 워크숍에서 태어났다.
샘슨(Samson)의 보컬리스트로 활야갛던 브루스 디킨슨이 아이언 메이든호에 승선한 것은 1981년이었다. 그의 가입과 동시에 아이언 메이든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아이언 메이든의 대표 앨범 「The Number Of The Beast」, 「Killers」, 「Powerslave」등이 모두 브루스 디킨슨 재적 시절에 터져나온 것들이었다. 브루스 디킨슨의 광폭한(?) 보컬은 아이언 메이든의 상징이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솔로 활동을 병행했던 그가 1994년 밴드를 공식 탈퇴하지 아이언 메이든이 순식간에 침체기로 접어든 것은 밴드 내에서 브루스 디킨슨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 하지만 브루스 디킨슨 없는 아이언 메이든이 있을 수 없었듯 아이언 메이든을 떠난 브루스 디킨슨 역시 힘을 잃긴 마찬가지였다. 솔로로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한 브루스 디킨슨은 1999년 다시 아이언 메이든으로 돌아왔고, 아이언 메이든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브루스 디킨슨은 17살 때까지 학교 대표 펜싱 선수로 활약했을 만큼 스포츠에도 소질을 보였고 소설을 써낼 만큼 글재주도 뛰어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샘슨(Samson)의 보컬리스트로 활야갛던 브루스 디킨슨이 아이언 메이든호에 승선한 것은 1981년이었다. 그의 가입과 동시에 아이언 메이든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아이언 메이든의 대표 앨범 「The Number Of The Beast」, 「Killers」, 「Powerslave」등이 모두 브루스 디킨슨 재적 시절에 터져나온 것들이었다. 브루스 디킨슨의 광폭한(?) 보컬은 아이언 메이든의 상징이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솔로 활동을 병행했던 그가 1994년 밴드를 공식 탈퇴하지 아이언 메이든이 순식간에 침체기로 접어든 것은 밴드 내에서 브루스 디킨슨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 하지만 브루스 디킨슨 없는 아이언 메이든이 있을 수 없었듯 아이언 메이든을 떠난 브루스 디킨슨 역시 힘을 잃긴 마찬가지였다. 솔로로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한 브루스 디킨슨은 1999년 다시 아이언 메이든으로 돌아왔고, 아이언 메이든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브루스 디킨슨은 17살 때까지 학교 대표 펜싱 선수로 활약했을 만큼 스포츠에도 소질을 보였고 소설을 써낼 만큼 글재주도 뛰어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브루스 디킨슨 |
마이클 잭슨 |
형님 두분은 모두 58년 개띠. 왜 58년 개띠는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가. 영원히 의문으로 남겨진 미제이다. 동갑내기이지만 한명은 세상을 달리했고 한명은 여전히 당당하게 노래를 하고 있다. 인생무상. 뭐 있는가. 브루스 디킨슨을 보면 글도 잘써, 운동도 잘해, 노래 잘해. 만능엔터테이너이다. 마치 소설가 이제하를 보는 듯하다. 글잘써, 노래 잘해, 시나리오도 써. 참 사람이란. 예술가란. 알 길이 없다. 여전히 일장춘몽. 오랜만에 듣는 헤비메탈. 마구 신나있는 나의 멘탈.
아산 정주영
요즘 아버지 병간을 하면서 옆에 자리에 누워 아산 선생의 자서전을 읽고 있다(전자책 사이트에서 무료로 배포해서). 그냥 빈둥빈둥 있는 것보다 책이라도 읽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손에 늘 들고다니는 핸드폰으로 눈을 비비며 보고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뭐 딱히 할 말은 없다만.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2013-08-06
8월 6일
1928년_재킷일러스트레이션의 최고봉 앤드워홀 탄생
벨벳 언더그라운드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
롤링 스톤즈 「Sticky Fingers」 |
이제는 CD의 시대도 어느덧 지나고 인터넷과 모바일을 활용한 다양한 형태의 음악 콘텐츠들이 과거의 매체들을 급속히 대체하고 있지만 사실 예전의 LP시절과 비교하면 뭔가 아쉬움이 큰 것도 사실이다. 과거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앨범이라는 형태로 소장하겠다는 욕구는 음악 팬들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욕구였고 그런 면엥서 본다면 멋스러운 재킷으로 눈길을 끌었던 LP시절이 가장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다. 큼직해서 보기에도 시원스러운 LP재킷은 그 그림과 사진만으로도 화제를 모으며 수집광들의 구매욕을 자극하곤 했다.
앨범 재킷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일가를 이루었던 사람들은 여럿 있지만 그중 최고봉은 단연 앤드 워홀(Andy Warhol)이었다. 피츠버그 출신으로 대학에서 디자인을 공부한 그는 화가로도서도 활동했고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떨친 팝아트의 선구적인 인물이었지만 음악과 관련한 그의 경력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요약될 수 있다. 그 첫번째는 그가 전설적인 그룹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매니저 겸 프로듀서였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앞서 말한 것처럼 그가 앨범 재킷 일러스트레이션의 일인자였다는 사실.
그가 만들어낸 굵직굺직한 앨범 재킷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데뷔 앨범 「The Velvet Underground & Nico」와 롤링 스톤즈의 앨범 「Sticky Fingers」가 가장 뛰어난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The Velvet Underground & Nico」는 바나나를 그린 실크스크린이 인상적이어서 이른바 '바나나 앨범'으로 불리는 명반이고 「Sticky Fingers」 역시 앨범 재킷에 실제 지퍼가 달려서 이것을 열면 앨범 속지에 팬티가 드러나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과연 앤디 워홀이라는 탄성을 자아내게 했던 작품이다.
1928년 8월 6일은 재킷 일러스트레이션의 최고봉 앤디 워홀이 태어난 날이다.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벨벳 언더그라운드 & 니코 |
롤링 스톤즈 |
앤디 워홀 |
이미 예술의 상업화로 위대한 업적을 이루신 우리 워홀형님으로 배운 생각의 전환은 지금껏 화두가 되고있는 현실가 맞닿아있다. 단순히 예술이 고고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이 형님의 자서전을 읽어보길. 일명 '앤디워홀의 철학'. 각각의 앨범 속에 있는 상큼하게 띵동띵동 거리는 벨벳의 노래와 비틀즈와 유일하게 견줄 수 있는 영국 밴드 롤링의 노래를 한 곡씩 감상해 봅시다. 이 두 앨범을 모두 갖고 있는 나는 정말 영광입니다. 워홀형님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문득 워홀형님보니 모르핀 먹고 생을 마감하신 발터 벤야민 형님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책이 생각나고, 롤링 스톤즈 노래는 'sister morphine'이고, 참 갖가지 생각이 다나네.
2013-08-05
8월 5일
1957년_최초의 본격 음악 프로그램
아메리칸 밴드스탠드의 시작
아메리칸 밴드스탠드의 시작
1952년 미국 필라델피아 지역에서 시작된 아메리칸 밴드스탠드(American Bandstand)는 처음에는 그저 필라델피아 지역에서만 볼 수 있었던 일개 지역 방송 프로그램일 뿐이었다. 하지만 프로그램이 점점 인기를 더해가자 ABC방송은 아메리칸 밴드스탠드를 전국 방송으로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성공 여부를 놓고 다소 이견이 있었지만 결론은 가능성이 높다는 쪽이었고 마침내 1957년 8월 5일, 아메리칸 밴드스탠드는 미국 전역으로 첫 전파를 탔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아메리칸 밴드스탠드는 미국 전역으로 방송되기 시작한 지 불과 4주만에 시청률 1위를 기록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결과적으로 본격적인 음악 프로그램의 효시라는 평가 속에 팝음악사상 가장 중요한 방송 프로그램으로 남았다. 당시 아메리칸 밴드스탠드의 사회자가 바로 유명한 DJ 딕 클락(Dick Clark)으로, 앨런 프리드와 함께 DJ 전성시대를 열었던 주인공이다. 아메리칸 밴드스탠드는 탁월한 DJ 딕 클락이 있어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아메리칸 밴드스탠드의 인기 덕에 딕 클락이 전국구 스타가 될 수 있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어찌 되었던 간에 1957년 8월 5일, 미국 전역을 향해 첫 전파를 발사한 아메리칸 밴드슽앤드는 미국의 최장수 본격 음악 방송으로 1980년대 M-TV가 등장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던, 음악 프로그램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설적인 프로그램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아메리칸 밴드스탠드는 미국 전역으로 방송되기 시작한 지 불과 4주만에 시청률 1위를 기록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결과적으로 본격적인 음악 프로그램의 효시라는 평가 속에 팝음악사상 가장 중요한 방송 프로그램으로 남았다. 당시 아메리칸 밴드스탠드의 사회자가 바로 유명한 DJ 딕 클락(Dick Clark)으로, 앨런 프리드와 함께 DJ 전성시대를 열었던 주인공이다. 아메리칸 밴드스탠드는 탁월한 DJ 딕 클락이 있어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아메리칸 밴드스탠드의 인기 덕에 딕 클락이 전국구 스타가 될 수 있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어찌 되었던 간에 1957년 8월 5일, 미국 전역을 향해 첫 전파를 발사한 아메리칸 밴드슽앤드는 미국의 최장수 본격 음악 방송으로 1980년대 M-TV가 등장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던, 음악 프로그램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설적인 프로그램이다.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DJ Dick Clark & American Bandstand(USA) |
미국에는 아메리칸 밴드스탠드(1989년 종영)가 있었다면, 대한민국에 최장수 음악프로그램은 전국노래자랑(2013년 현재 진행형). 대한민국 장수프로그램 중 당당히 2위를 기록하며 아직도 승승장구하는 이 프로그램을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 최고의 신랑이 송해선생님이라고 하던데....만 86세이신 지금도 당당히 방송을 하고 계셔서 그런듯 싶다. 여하튼. 각 나라의 국민프로그램은 하나씩 있어야지?
DJ Song Hae & Jeonkook Noraejarang(South Korea) |
2013-08-04
8월 4일
1956년_최고의 인기 흑인 그룹 플래터스
플래터스 「The Platters」 |
흑인 음악의 역사에서 플래터스(Platters)의 중요성은 두말할 것도 없다. 플래터스는 흑인 그룹으로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둔 최초의 그룹이기 때문이다. 1956년 8월 4일 플래터스의 최대 히트곡 <My prayer>가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라섰다. 5주 동안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머문 <My prayer>는 <The great pretender(후에 퀸의 리메이크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에 이은 그룹의 두 번째 빌보드 싱글 차트 넘버원 곡으로 흑인 그룹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곡이다.
<The great pretender>로 포문을 열고 <My prayer>로 전성기를 열어젖힌 플래터스의 활약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50년대가 가기 전에 플래터스가 보여준 활약은 참으로 뛰어난 것이었는데 수많은 그들의 히트곡 중 특히 우리에게 친숙한 곡은 1958년 역시 빌보드 싱긍글 차트 넘버원을 기록한 <Smoke gets in your eyes>.
내가 아는 한 그들의 최고의 노래는 이것이다. 그들을 알기 전까지 이렇게 훌륭한 노래의 행방조차 찾지 못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알아버린 그들의 목소리를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정말 사랑스러운 노래이다. 제목이 'only you'. 마치 씨스타의 <only you>와는 사뭇다른 흑형과 누님들의 하모니를 보소.
2013-08-03
8월 3일
1963년_비틀즈의 마지막 캐번 클럽공연
영국의 리버풀은 지금은 많이 쇠락한 도시다. 한때 최대의 항구도시로 번성했던 리버풀은 이제 군데군데 폐허처럼 빈집이 흉흉하고 도시는 전체적으로 썰렁한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그런 리버풀에도 여전히 붐비는 몇몇 장소들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비틀즈(Beatles)와 관련된 곳들이다. 비틀즈 박물관, 그리고 캐번 클럽(Cavern Club)은 리버풀을 찾는 관광객들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필수 코스다. 리버풀은 영원한 비틀스의 고향인 것이다.
1963년 8월 3일, 비틀즈가 캐번 클럽에서 자신들의 마지막 공연을 펼쳤다. 정확히 그들의 294번째 공연이었다. 캐번 클럽, 무명시절 비틀즈가 연주했던 곳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영국 최고의 관광 명소가 된 행운의 클럽이다. 한때 운영난으로 문을 닫기도 했지만 다시 문을 열고 지금도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
1963년 8월 3일, 비틀즈가 캐번 클럽에서 자신들의 마지막 공연을 펼쳤다. 정확히 그들의 294번째 공연이었다. 캐번 클럽, 무명시절 비틀즈가 연주했던 곳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영국 최고의 관광 명소가 된 행운의 클럽이다. 한때 운영난으로 문을 닫기도 했지만 다시 문을 열고 지금도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은 최대의 포크 축제였지만 1965년 이후 어딘가 허전했다. 포크의 제왕 밥 딜런(Bob Dylan)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자기타를 손에 들고 무대에 올랐다 변절자로 몰린 1965년 이후 밥 딜런은 단 한 번도 뉴포트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만큼 충격이 컸던 것일까?
밥 딜런의 뉴포트 보이콧은 그로부터 37년이 흐른 2002년 8월 3일에야 비로소 끝났다. 이날 밥 딜런은 37년 만에 뉴포트 무대에 올라 열정적인 공연을 펼침으로써 포크 팬들에게 또 하나의 감동적인 장면을 선사했다. 그리고 2%부족했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도 완성되었다.
2002년 8월 3일,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은 밥 딜런의 귀환으로 비로소 흠결 없는 포크의 최대 축제로 거듭났다.
밥 딜런의 뉴포트 보이콧은 그로부터 37년이 흐른 2002년 8월 3일에야 비로소 끝났다. 이날 밥 딜런은 37년 만에 뉴포트 무대에 올라 열정적인 공연을 펼침으로써 포크 팬들에게 또 하나의 감동적인 장면을 선사했다. 그리고 2%부족했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도 완성되었다.
2002년 8월 3일,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은 밥 딜런의 귀환으로 비로소 흠결 없는 포크의 최대 축제로 거듭났다.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8월 3일에는 비록 어떠한 개인에게는 소소한 일이지만 그들의 이름값(name value)때문에 특별한 날이 되었다. 캐번 클럽에서 마지막 공연을 하게 된 비틀즈와, 37년만에 뉴포트로 귀환한 밥 딜런. 캐번 클럽은 그 후 리버플 최강의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하였다. 아래의 주소로 들어가면 현재 캐번 클럽의 공연일정과 시간을 볼 수 있다니 참고하도록.
늙어버린 밥 딜런형님. 나는 그의 젊은 시절의 모습이 좋긴하다만. 진정 약 강산이 4번정도 바뀔즈음, 다시 복귀한 그 무대는 어떠하였을까? 영어공부할 겸사겸사 찾아보았음. 마치 늙고 고향을 찾아간 그러한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그 당시의 평가와 지금의 평가를 비교해보기 위하였을까? 형님의 마음은 모르겠지만, 다시금 돌아온 형님은 나날이 세월이 흐를스록 간지남이 되어가는 것만은 사실인듯하다. 밑에는 당시 뉴포트콘서트 형님의 공연에 관한 리뷰 글이다. 셋 리스트도 나와있으니, 오늘은 오랜만에 밥 딜런 앨범이나 들어야겠다. Like a rolling stone. 요즘 인생이 구르는 돌같으니 말이다.
http://www.berkshirelinks.com/bob-dylan-concert-review-newport-folk-festival-aug-3-2002/
Setlist (thanks to Bill Pagel at BobLinks):
1. Roving Gambler (acoustic)
2. The Times They Are A-Changin’ (acoustic) (Larry on cittern)
3. Desolation Row (acoustic)
4. Mama, You Been On My Mind (acoustic) (Bob on harp)
5. Down In The Flood
6. Positively 4th Street
7. Subterranean Homesick Blues (Larry on slide guitar)
8. Cry A While (Larry on slide guitar)
9. Girl Of The North Country (acoustic) (Bob on harp)
10. Tangled Up In Blue (acoustic) (Bob on harp)
11. Mr. Tambourine Man (acoustic)
12. Summer Days (Tony on standup bass)
13. You Ain’t Goin’ Nowhere (Larry on pedal steel)
14. The Wicked Messenger (Bob on harp)
15. Leopard-Skin Pill-Box Hat
2. The Times They Are A-Changin’ (acoustic) (Larry on cittern)
3. Desolation Row (acoustic)
4. Mama, You Been On My Mind (acoustic) (Bob on harp)
5. Down In The Flood
6. Positively 4th Street
7. Subterranean Homesick Blues (Larry on slide guitar)
8. Cry A While (Larry on slide guitar)
9. Girl Of The North Country (acoustic) (Bob on harp)
10. Tangled Up In Blue (acoustic) (Bob on harp)
11. Mr. Tambourine Man (acoustic)
12. Summer Days (Tony on standup bass)
13. You Ain’t Goin’ Nowhere (Larry on pedal steel)
14. The Wicked Messenger (Bob on harp)
15. Leopard-Skin Pill-Box Hat
(encore)
16. Not Fade Away
17. Like A Rolling Stone
18. Blowin’ In The Wind (acoustic)
19. All Along The Watchtower
16. Not Fade Away
17. Like A Rolling Stone
18. Blowin’ In The Wind (acoustic)
19. All Along The Watchtower
2013-08-02
8월 2일
1989년_솔로로서도 성공 가도를 이어간 피터 세트라
피터 세트라 「Solitude / Solitaire」 |
피터 세트라(Peter Cetera)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인기 그룹 시카고(Chicago)의 전성기를 이끈 간판 보컬리스트다. 그는 더할 수 없는 달콤한 미성으로 대중들의 귀를 사로잡았으며 그의 매력으로 인해 시카고는 인기 정상의 그룹으로 발돋음을 할 수 있었다. <If you leave me now>, <Hard to say I'm sorry>, <You're the inspiration>, <Stay the night> 등 시카고의 전성기를 화려하게 수놓은 히트곡들 모두 피터 세트라 재적시에 터져나온 것들이다.
1985년 피터 세트라는 그룹의 17번째 앨범인 「Chicago 17」을 마지막으로 시카고를 탈퇴했다. 아무리 뛰어난 뮤지션이라도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그룹을 떠난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고 부담되는 일이다. 하지만 피터 세트라는 현실에 안주하는 대신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도전은 성공했다.
피터 세트라는 솔로로 전향하자마자 1986년 8월 2일, <Glory of love>를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올려놓으며 솔로로서도 자신의 건재함을 만방에 과시했다. 「The Karate Kids, Part 2」의 주제가로 2주간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머물렀던 <Glory of love>는 그해 아카데미와 그래미에도 노미네이트되면서 피터 세트라의 위상을 한껏 곧추세웠다.1986년 8월 2일, 자신의 첫 번째 솔로 넘버원 곡 <Glory of love>로 솔로로서 힘찬 출발을 장식한 피터 세트라는 그해가 가기 전에 다시 에이미 그렌트와 듀엣으로 부른 <The next time I fall>을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려놓으며 일각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솔로로서도 탄탄한 성공의 기반을 쌓아갔다.
당시에 에이미 그란트는 이미 CCM계에서 여왕으로 재림했던 양반이지만, 일반적인 대중들에게는 낯선이였다. 그러나 피터 세트라와의 듀엣으로 인하여 그녀 또한 일반적 대중들에게 인지도를 쌓아나갔다고 한다. 원래는 피터 세트라의 앨범에만 실렸던 곡인데 이 곡으로 인해서 에이미 그란트 또한 엄청난 명성에 힘입어 에이미 그란트의 「The Greatest Hits」에도 수록되어 있다는데....역시 인생역전은 한방이지만, 인생역전을 마냥 바라보는 것은 옳지 않은 태도들이니 명심하시길..
당시에 스타일이 청청인 것으로 보아, 올 가을 나도 청청으로 갈까싶기도 하고..
당시에 스타일이 청청인 것으로 보아, 올 가을 나도 청청으로 갈까싶기도 하고..
2013-08-01
8월 1일
1981년_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M-TV 개국
버글스 「The Ace Of Plastic」 |
1981년 8월 1일 이전에는 음악은 듣고 즐기는 것이었다. 음악은 라디오를 통해 듣거나 혹은 금전적인 여유가 있다면 음반을 사서 들으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1981년 8월 1일 이후 음악은 듣는 것만이 아니라 보고 즐기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왜 1981년 8월 1일인가? 그것은 바로 이날이 혁명적 변화를 선도했던 M-TV가 개국, 첫 전파를 발사한 날이기 때문이다.
M-TV의 개국은 팝 음악의 흐름을 바꿔놓은 일대 사건이었다. '비디오가 리디오 스타를 죽인다'라는 제목부터 의미심장한 버글스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의 뮤직비디오로 포문을 연 M-TV는 24시간 계속해서 뮤직 비디오만을 틀어주는 음악 전문 케이블 채널이었다.
그 이전까지 가수들의 성공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라디오에서 그들의 노래를 얼마나 많이 틀어주느냐 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M-TV에서 그들의 뮤직 비디오를 얼마나 많이 틀어주느냐가 더욱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M-TV 등장 이후 가수들에게는 라디오보다 더 중요한 홍보수단이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뮤직비디오가 가장 중요한 홍보수단으로 등장하자 너나 할 것 없이 뮤직 비디오에 많은 돈과 공을 들였고 그 결과 수많은 비디오 스타들이 양산되기 시작했다. 음성보다는 잘생긴 용모와 화려한 무대 매너가 인기를 가늠하는 더 중요한 척도가 되는 부작용되 심화되었지만 음악 역시도, 특히 대중음악은, 다수 대중을 위한 엔터테인먼트의 일종이라고 본다면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흐림을 수도 있었다.
M-TV의 초창기는 바다 건너 영국에서 건너온 듀란 듀란, 컬처클럽, 왬 등 이른바 뉴 로맨특 그룹들이 주도했지만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를 앞세운 미국세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또 본 조비, 포이즌, 스키드 로우 등 이른바 LA메탈 밴드 역시 M-TV의 수혜자들이었다. 이들은 기존의 거친 헤비메탈에 대중적인 말랑말랑한 멜로디 라인을 끌어들여 음악적인 면에서도 인기를 얻었지만 잘생긴 용모를 내세운 뮤직 비디오가 이들의 인기몰이에 큰 역할을 했던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다.
M-TV의 등장은 명백하게 음악의 상업화를 가속화시키는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 누구도 M-TV와 뮤직 비디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그것을 무시하고는 시장에 견뎌낼 수가 없었다.
M-TV의 개국은 팝 음악의 흐름을 바꿔놓은 일대 사건이었다. '비디오가 리디오 스타를 죽인다'라는 제목부터 의미심장한 버글스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의 뮤직비디오로 포문을 연 M-TV는 24시간 계속해서 뮤직 비디오만을 틀어주는 음악 전문 케이블 채널이었다.
그 이전까지 가수들의 성공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라디오에서 그들의 노래를 얼마나 많이 틀어주느냐 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M-TV에서 그들의 뮤직 비디오를 얼마나 많이 틀어주느냐가 더욱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M-TV 등장 이후 가수들에게는 라디오보다 더 중요한 홍보수단이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뮤직비디오가 가장 중요한 홍보수단으로 등장하자 너나 할 것 없이 뮤직 비디오에 많은 돈과 공을 들였고 그 결과 수많은 비디오 스타들이 양산되기 시작했다. 음성보다는 잘생긴 용모와 화려한 무대 매너가 인기를 가늠하는 더 중요한 척도가 되는 부작용되 심화되었지만 음악 역시도, 특히 대중음악은, 다수 대중을 위한 엔터테인먼트의 일종이라고 본다면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흐림을 수도 있었다.
M-TV의 초창기는 바다 건너 영국에서 건너온 듀란 듀란, 컬처클럽, 왬 등 이른바 뉴 로맨특 그룹들이 주도했지만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를 앞세운 미국세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또 본 조비, 포이즌, 스키드 로우 등 이른바 LA메탈 밴드 역시 M-TV의 수혜자들이었다. 이들은 기존의 거친 헤비메탈에 대중적인 말랑말랑한 멜로디 라인을 끌어들여 음악적인 면에서도 인기를 얻었지만 잘생긴 용모를 내세운 뮤직 비디오가 이들의 인기몰이에 큰 역할을 했던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다.
M-TV의 등장은 명백하게 음악의 상업화를 가속화시키는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 누구도 M-TV와 뮤직 비디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그것을 무시하고는 시장에 견뎌낼 수가 없었다.
1971년 8월 1일,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는 방글라데시 기아 난민들을 돕기 위한 초대형 콘서트가 개최되었다. 당시 연일 매스컴을 장식하던 방글라데시 기아 난민들의 소식을 접하고 충격을 받은 조지 해리슨에 의해 기획된 콘서트에는 링고 스타, 에릭 클랩튼, 밥 딜런, 배드핑거, 레온 러셀 등 당대의 슈퍼 스타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또 서구에 인도의 전통악기인 시타르를 소개한 장본인이며 조지 해리슨의 시타르 스승이기도 한 라비 상카도 힘을 보탰다. 입장료와 중계료를 포함한 모든 수입은 전액 방글라데시 난민 구호사업에 사용되었는데 이것이 사실상 1980년대 중반 'Band Aid'와 'Live Aid'등을 통해 최고조에 이른 팝 스타들의 합동 자선 공연의 효시였다.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M-TV의 개국이 과연 라디오의 종말을 예고했던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버젓이 라디오는 쏠쏠하게 잘 버티고 있다. 그렇다면 전자책이 종이책을 말아먹을까?
해리슨 형님은 이미 동양의 모든 것과 서양의 모든 것을 절묘하게 혼합할 줄 아는 양반이었다는 것이다. 이미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밑에 글은 형님께서 멤버들 구하실 때 일화 중 일부이다.
-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식구였던 비틀스 멤버들이 가장 먼저였다. 존 레논에게 연락했다. 조지는 얼마 전까지 존의 솔로 앨범 < 이매진 > 세션에 참여해 우의를 다진 바 있었다. 하지만 존의 아내 요코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다. 조지 해리슨은 존 레논에게 요코 없이 혼자 와달라고 요청했다. 존도 처음에는 조지의 초대를 수락했지만 콘서트 날짜를 불과 며칠 남기지 않고 불참을 결정했다. 요코 오노에 따르면, 부부가 다 같이 출연하는 것을 놓고 남편과 다투고 난 뒤 결국 존 레논이 참가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감정이 남아있긴 했지만 조지 해리슨은 폴 매카트니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비틀스 해체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문제 때문에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매카트니는 해리슨의 초빙을 거절했다. 반면 링고 스타는 과연 대인배답게 의리를 지키며 이벤트에 동참했다.
“방글라데시 콘서트에 와서 연주해줄 수 있는지 조지가 물어봤어요. 속으로 생각했죠. '맙소사. 어쩌라는 거야? 이제 막 해체했는데 다시 합치라고?' 과연 제정신인가 싶더라고요.” (폴 매카트니, < 롤링 스톤 >, 1974)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외에도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 같은 경우는 비자가 나오지 않아 섭외가 불가능했다. 조지 해리슨이 가장 공을 들인 출연자는 밥 딜런이었다. 해리슨만큼이나 대중들 앞에 나서기 싫어하던 딜런은 모시기도 힘들었지만 리허설까지 마치고도 끝까지 속 시원하게 연주하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아 애를 태웠다. 이윽고 조지 해리슨과 라비 샹카르는 점성술사에게 길일을 받아 8월 1일을 콘서트 날짜로 정했다. 그들이 알아본 장소 가운데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가든이 유일하게 그날 비었던 터라 해리슨이 그곳을 예약했다. 이어 플라자호텔 스위트룸을 근거지로 삼고 쇼를 준비했다. 뮤지션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고 모두 노개런티로 출연을 약속했다.
감정이 남아있긴 했지만 조지 해리슨은 폴 매카트니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비틀스 해체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문제 때문에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매카트니는 해리슨의 초빙을 거절했다. 반면 링고 스타는 과연 대인배답게 의리를 지키며 이벤트에 동참했다.
“방글라데시 콘서트에 와서 연주해줄 수 있는지 조지가 물어봤어요. 속으로 생각했죠. '맙소사. 어쩌라는 거야? 이제 막 해체했는데 다시 합치라고?' 과연 제정신인가 싶더라고요.” (폴 매카트니, < 롤링 스톤 >, 1974)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외에도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 같은 경우는 비자가 나오지 않아 섭외가 불가능했다. 조지 해리슨이 가장 공을 들인 출연자는 밥 딜런이었다. 해리슨만큼이나 대중들 앞에 나서기 싫어하던 딜런은 모시기도 힘들었지만 리허설까지 마치고도 끝까지 속 시원하게 연주하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아 애를 태웠다. 이윽고 조지 해리슨과 라비 샹카르는 점성술사에게 길일을 받아 8월 1일을 콘서트 날짜로 정했다. 그들이 알아본 장소 가운데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가든이 유일하게 그날 비었던 터라 해리슨이 그곳을 예약했다. 이어 플라자호텔 스위트룸을 근거지로 삼고 쇼를 준비했다. 뮤지션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고 모두 노개런티로 출연을 약속했다.
- 고영탁의 조지 해리슨의 이야기 中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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