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_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M-TV 개국
버글스 「The Ace Of Plastic」 |
1981년 8월 1일 이전에는 음악은 듣고 즐기는 것이었다. 음악은 라디오를 통해 듣거나 혹은 금전적인 여유가 있다면 음반을 사서 들으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1981년 8월 1일 이후 음악은 듣는 것만이 아니라 보고 즐기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왜 1981년 8월 1일인가? 그것은 바로 이날이 혁명적 변화를 선도했던 M-TV가 개국, 첫 전파를 발사한 날이기 때문이다.
M-TV의 개국은 팝 음악의 흐름을 바꿔놓은 일대 사건이었다. '비디오가 리디오 스타를 죽인다'라는 제목부터 의미심장한 버글스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의 뮤직비디오로 포문을 연 M-TV는 24시간 계속해서 뮤직 비디오만을 틀어주는 음악 전문 케이블 채널이었다.
그 이전까지 가수들의 성공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라디오에서 그들의 노래를 얼마나 많이 틀어주느냐 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M-TV에서 그들의 뮤직 비디오를 얼마나 많이 틀어주느냐가 더욱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M-TV 등장 이후 가수들에게는 라디오보다 더 중요한 홍보수단이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뮤직비디오가 가장 중요한 홍보수단으로 등장하자 너나 할 것 없이 뮤직 비디오에 많은 돈과 공을 들였고 그 결과 수많은 비디오 스타들이 양산되기 시작했다. 음성보다는 잘생긴 용모와 화려한 무대 매너가 인기를 가늠하는 더 중요한 척도가 되는 부작용되 심화되었지만 음악 역시도, 특히 대중음악은, 다수 대중을 위한 엔터테인먼트의 일종이라고 본다면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흐림을 수도 있었다.
M-TV의 초창기는 바다 건너 영국에서 건너온 듀란 듀란, 컬처클럽, 왬 등 이른바 뉴 로맨특 그룹들이 주도했지만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를 앞세운 미국세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또 본 조비, 포이즌, 스키드 로우 등 이른바 LA메탈 밴드 역시 M-TV의 수혜자들이었다. 이들은 기존의 거친 헤비메탈에 대중적인 말랑말랑한 멜로디 라인을 끌어들여 음악적인 면에서도 인기를 얻었지만 잘생긴 용모를 내세운 뮤직 비디오가 이들의 인기몰이에 큰 역할을 했던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다.
M-TV의 등장은 명백하게 음악의 상업화를 가속화시키는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 누구도 M-TV와 뮤직 비디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그것을 무시하고는 시장에 견뎌낼 수가 없었다.
M-TV의 개국은 팝 음악의 흐름을 바꿔놓은 일대 사건이었다. '비디오가 리디오 스타를 죽인다'라는 제목부터 의미심장한 버글스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의 뮤직비디오로 포문을 연 M-TV는 24시간 계속해서 뮤직 비디오만을 틀어주는 음악 전문 케이블 채널이었다.
그 이전까지 가수들의 성공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라디오에서 그들의 노래를 얼마나 많이 틀어주느냐 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M-TV에서 그들의 뮤직 비디오를 얼마나 많이 틀어주느냐가 더욱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M-TV 등장 이후 가수들에게는 라디오보다 더 중요한 홍보수단이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뮤직비디오가 가장 중요한 홍보수단으로 등장하자 너나 할 것 없이 뮤직 비디오에 많은 돈과 공을 들였고 그 결과 수많은 비디오 스타들이 양산되기 시작했다. 음성보다는 잘생긴 용모와 화려한 무대 매너가 인기를 가늠하는 더 중요한 척도가 되는 부작용되 심화되었지만 음악 역시도, 특히 대중음악은, 다수 대중을 위한 엔터테인먼트의 일종이라고 본다면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흐림을 수도 있었다.
M-TV의 초창기는 바다 건너 영국에서 건너온 듀란 듀란, 컬처클럽, 왬 등 이른바 뉴 로맨특 그룹들이 주도했지만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를 앞세운 미국세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또 본 조비, 포이즌, 스키드 로우 등 이른바 LA메탈 밴드 역시 M-TV의 수혜자들이었다. 이들은 기존의 거친 헤비메탈에 대중적인 말랑말랑한 멜로디 라인을 끌어들여 음악적인 면에서도 인기를 얻었지만 잘생긴 용모를 내세운 뮤직 비디오가 이들의 인기몰이에 큰 역할을 했던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다.
M-TV의 등장은 명백하게 음악의 상업화를 가속화시키는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 누구도 M-TV와 뮤직 비디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그것을 무시하고는 시장에 견뎌낼 수가 없었다.
1971년 8월 1일,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는 방글라데시 기아 난민들을 돕기 위한 초대형 콘서트가 개최되었다. 당시 연일 매스컴을 장식하던 방글라데시 기아 난민들의 소식을 접하고 충격을 받은 조지 해리슨에 의해 기획된 콘서트에는 링고 스타, 에릭 클랩튼, 밥 딜런, 배드핑거, 레온 러셀 등 당대의 슈퍼 스타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또 서구에 인도의 전통악기인 시타르를 소개한 장본인이며 조지 해리슨의 시타르 스승이기도 한 라비 상카도 힘을 보탰다. 입장료와 중계료를 포함한 모든 수입은 전액 방글라데시 난민 구호사업에 사용되었는데 이것이 사실상 1980년대 중반 'Band Aid'와 'Live Aid'등을 통해 최고조에 이른 팝 스타들의 합동 자선 공연의 효시였다.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M-TV의 개국이 과연 라디오의 종말을 예고했던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버젓이 라디오는 쏠쏠하게 잘 버티고 있다. 그렇다면 전자책이 종이책을 말아먹을까?
해리슨 형님은 이미 동양의 모든 것과 서양의 모든 것을 절묘하게 혼합할 줄 아는 양반이었다는 것이다. 이미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밑에 글은 형님께서 멤버들 구하실 때 일화 중 일부이다.
-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식구였던 비틀스 멤버들이 가장 먼저였다. 존 레논에게 연락했다. 조지는 얼마 전까지 존의 솔로 앨범 < 이매진 > 세션에 참여해 우의를 다진 바 있었다. 하지만 존의 아내 요코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다. 조지 해리슨은 존 레논에게 요코 없이 혼자 와달라고 요청했다. 존도 처음에는 조지의 초대를 수락했지만 콘서트 날짜를 불과 며칠 남기지 않고 불참을 결정했다. 요코 오노에 따르면, 부부가 다 같이 출연하는 것을 놓고 남편과 다투고 난 뒤 결국 존 레논이 참가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감정이 남아있긴 했지만 조지 해리슨은 폴 매카트니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비틀스 해체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문제 때문에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매카트니는 해리슨의 초빙을 거절했다. 반면 링고 스타는 과연 대인배답게 의리를 지키며 이벤트에 동참했다.
“방글라데시 콘서트에 와서 연주해줄 수 있는지 조지가 물어봤어요. 속으로 생각했죠. '맙소사. 어쩌라는 거야? 이제 막 해체했는데 다시 합치라고?' 과연 제정신인가 싶더라고요.” (폴 매카트니, < 롤링 스톤 >, 1974)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외에도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 같은 경우는 비자가 나오지 않아 섭외가 불가능했다. 조지 해리슨이 가장 공을 들인 출연자는 밥 딜런이었다. 해리슨만큼이나 대중들 앞에 나서기 싫어하던 딜런은 모시기도 힘들었지만 리허설까지 마치고도 끝까지 속 시원하게 연주하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아 애를 태웠다. 이윽고 조지 해리슨과 라비 샹카르는 점성술사에게 길일을 받아 8월 1일을 콘서트 날짜로 정했다. 그들이 알아본 장소 가운데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가든이 유일하게 그날 비었던 터라 해리슨이 그곳을 예약했다. 이어 플라자호텔 스위트룸을 근거지로 삼고 쇼를 준비했다. 뮤지션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고 모두 노개런티로 출연을 약속했다.
감정이 남아있긴 했지만 조지 해리슨은 폴 매카트니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비틀스 해체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문제 때문에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매카트니는 해리슨의 초빙을 거절했다. 반면 링고 스타는 과연 대인배답게 의리를 지키며 이벤트에 동참했다.
“방글라데시 콘서트에 와서 연주해줄 수 있는지 조지가 물어봤어요. 속으로 생각했죠. '맙소사. 어쩌라는 거야? 이제 막 해체했는데 다시 합치라고?' 과연 제정신인가 싶더라고요.” (폴 매카트니, < 롤링 스톤 >, 1974)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외에도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 같은 경우는 비자가 나오지 않아 섭외가 불가능했다. 조지 해리슨이 가장 공을 들인 출연자는 밥 딜런이었다. 해리슨만큼이나 대중들 앞에 나서기 싫어하던 딜런은 모시기도 힘들었지만 리허설까지 마치고도 끝까지 속 시원하게 연주하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아 애를 태웠다. 이윽고 조지 해리슨과 라비 샹카르는 점성술사에게 길일을 받아 8월 1일을 콘서트 날짜로 정했다. 그들이 알아본 장소 가운데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가든이 유일하게 그날 비었던 터라 해리슨이 그곳을 예약했다. 이어 플라자호텔 스위트룸을 근거지로 삼고 쇼를 준비했다. 뮤지션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고 모두 노개런티로 출연을 약속했다.
- 고영탁의 조지 해리슨의 이야기 中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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