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장미여관으로 초판 표지 |
'장미여관'은 내 상상 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여관이다. 장미여관은 내게 있어 두 가지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나그네의 여정(旅程)과 향수를 느끼게 해주는 여관이다. 우리는 잡다한 현실을 떠나 어디론가 홀가분하게 탈출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살아간다. 나의 정체를 숨긴 채 일시적으로나마 모든 체면과 윤리와 의무들로부터 해방되어 안주하고 싶은 곳 - 그곳이 바로 장미여관이다. 또 다른 하나는 '러브 호텔'로서의 장미여관, 붉은 네온사인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곳, 비밀스런 사랑의 전율이 꿈틀대는 도시인의 휴식공간이다.
우리는 진정한 안식처를 직장이나 가정에서 구할 수 없다. 직장의 분위기는 위선적 체면치레와 복잡한 인간관계가 얽혀 우리를 숨막히게 한다. 가정은 겉보기엔 단란하지만 사실상 갖가지 컴플렉스들이 럭혀서 꿈틀대는 고뇌의 장(場)이다. 가족관계란 싫든 좋든 평생 묶여서 지내야 하는 굴레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우리는 잠깐만이라도 모든 세속적 윤리와 도덕을 초월하여 어디론가 도피함으로써 자유를 호흡할 수 있어야 한다. 장미여관 - 그 달콤한 음탕과 불안한 관능이 숨쉬는 곳, 거기서 우리는 비로서 자연의 질서와 억압에 저항하는 '관능적 상상력'과 '변태적 욕구'를 감질나게나마 충족시킬 수 있고, 우리의 일탈욕구(逸脫欲求)를 위안받을 수 있다.
이 시집의 표제로 삼은 <가자, 장미여관으로!>를 쓴 1985년 여름을 전후하여 내 시 스타일은 많이 바뀌었다. 그 이전까지는 유미적 쾌락에의 욕구와 현실상황에 대한 고뇌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는' 식의 내용이 많았다. 여인의 긴 손톱은 섹시하다. 그러나 그런 손톱은 '민중적 손톱'은 아니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나는 공연히 '민중적 고뇌'로 괴로워하는 척하면서 지식인의 명예욕을 충족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초기작에서는 치열한 고뇌와 갈등이 엿보이는데 요즘 작품은 너무 퇴폐적으로 흐르고 있다고 지적해주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오히려 나로서는 그 '치열한 고뇌의 정신'이 부끄럽고 창피하게만 느껴진다. 말하자면 나는 솔직하게 발가벗지 못하고 그저 엉거주춤 발가벗는 척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나는 그런 지식인의 위선을 떨쳐 버리기로 결심하였다. 아무런 단서나 변명 없이도, 여인의 긴 손톱은 아름답고 야한 여자의 고혹적인 관능미는 나의 상상력을 활기차게 한다. 모든 사람들은 다 민중으로 만들 것이 아니라 다 귀족으로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귀족들만이 누렸던 감미로운 사치와 쾌락을 맛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요즘의 내 생각이다. 사람들은 모두 '진정한 쾌락'을 위해서 산다. 지배계급에 대한 적의(敵意)는 쾌락에 대한 선망일 뿐, 숭고한 평등의식의 소산은 아니다.
누구나 잘사는 사회, 누구나 스스로의 야한 아름다움을 나르시시즘으로 즐길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만 한다. 일을 안해 '희고 고운 손'을 질투한 나머지 모든 여성의 손을 '거칠고 못이 박힌 손'으로 만들어 버리자고 신경질적으로 주장해서는 안된다. 모든 여성의 손을 다 '길게 손톱을 기른 화사한 손'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 아니라 괴로운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괴로운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즐거운 노동', 이를 테면 화장이나 손톱기르기 등을 통해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노동에서 진짜 관능적 쾌감을 얻을 수 있도록 구체적인 해결책을 모색해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유미주의에 바탕을 둔 쾌락주의, 또는 복지지상주의(福祉至上主義)가 요즘의 내 신조라면 신조라고 할 수 있다.
즐거운 권태와 감미로운 퇴폐미의 결합을 통한 관능적 상상력의 확장은 우리의 사고를 보다 자유롭고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인류의 역사는 상상을 현실화시키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꿈이 없는 현실은 무의미한 것이고 꿈과 현실은 분리되지 않는다. 꿈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적 실천을 가능케해주는 원동력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시에서의 상상이 설사 '생산적 상상'이 아니라 '변태적 공상'이 된다 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시는 꿈이요, 호나상이요, 상상의 카타르시스이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하는 행위조차 윤리나 도덕의 간섭을 받아야 한다면 우리의 삶은 정말로 초라하고 무기력해지고 말 것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시를 통해서 사라으이 배고픔과 새디스틱한 본능들을 대리배설시키고, 또 그럼으로써 격노하는 본능과 위압적인 양심 사이에 평화로운 타협을 이루고 싶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여 현실 속의 나는 여전히 외롭다, 외롭다. 진짜 관능적인 사랑, 진짜 순수하게 육체적인 사랑, 모든 이데올로기적 선입관과 도덕적 위선을 떨쳐 버리고 솔직하게 발가벗을 수 있는 사랑이 내 앞에 펼쳐지기를 나는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 누가 나의 이 허기증을 달래 줄 수 있을는지? 그 어느 날에나 나는 상상 속의 장미여관이 아니라 진짜 현실 가운데 존재하는 장미여관에 포근하게 정착할 수 있을는지?
1989년 4월 마광수 (책 머리에)
광마선생을 누가 퇴폐적이라고 이야기했던가, 그의 생각만은 지극히 고고하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순수하다. 위의 서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도덕적 위선과 억압을 꿈 속에서나마 벗어던지고 싶어하는 순수한 청년이다. 그러나 우리는 도덕적 위선과 억압들을 꿈속에서 조차 당하고 있다. 이 얼마나 자유롭지 못하단 말인가. 그 어떠한 문학가가 이보다 솔직할 수 있으리오. 표현의 자유조차 이 땅에는 없다는 말인가. 그에 대해서 비판은 가능치만 비난은 하지말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우리는 정확히 모르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광마의 시 중 '가자, 장미여관으로!'가 작성된 시기를 전후로 한 시 2편을 읽어보자. 초기작에서 그는 치열한 고뇌와 갈등에 관한 작품들을 여러 선보였는데, 이것이 작가 스스로에게 창피함을 주었다면, 당연히 그러하다면 위선따윈 떨쳐버리고 순수한 '나'로 돌아가는 작업이 옳다고 생각한다. 순수해지자. 눈치보지말며.
가자, 장미여관으로! (1985)
만나서 이빨만 까기는 싫어
점잖은 척 뜸들이며 썰풀기는 더욱 싫어
러브 이즈 터치
러브 이즈 휠링
가자, 장미여관으로!
화사한 레스토랑에서 어색하게 쌍칼 놀리긴 싫어
없는 돈에 콜택시, 의젓한 드라이브는 싫어
사랑은 순간으로 와서 영원이 되는 것
난 말없는 보디 랭귀지가 제일 좋아
가자, 장미여관으로!
철학, 인생, 종교가 어쩌구저쩌구
세계의 운명이 자기 운명인 양 걱정하는체 주절주절
커핀은 초이스 심포니는 카라얀
나는 뽀뽀하고 싶어 죽겠는데, 오 그녀는 토론만 하자고 하네
가자, 장미여관으로!
블루스도 싫어 디스코는 더욱 싫어
난 네 발냄새를 맡고 싶어, 그 고린내에 취하고 싶어
네 치렁치렁 긴 머리를 빗질해 주고도 싶어
네 뾰족한 손톱마다 색색 가지 매니큐어를 발라 주고도 싶어
가자, 장미여관으로!
러브 이즈 터칭
러브 이즈 휠링
자유에 (1973)
우리들은 죽어가고 있는가, 우리들은 살아나고 있는가. 우리들의 목숨은 자라나는 돌덩이인가, 꺼져가는 꿈인가. 현실의 삶은 죽어가는 빛인가, 현실의 죽음은 뻗어가는 빛인가.
광마 마광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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