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7-31

7월 31일

1999년_폭우에 날아간 꿈, 아, 트라이포트여!



  1999년 7월 31일, 계획대로라면 그날은 한국 록의 신기원이 열리는 날이었다. 그 날은 한국에서 치러지는 세계적인 록 페스티벌의 가치를 내거너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이 열리는 날이었다. 8월 1일까지 이틀간의 일정으로 예정된 페스티벌에 참가를 약속한 라인업은 화려했다. 김종서, 김경호, 크래시 등 한국 최강의 밴드들은 물론이고 딥 퍼플,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드림 씨어터, 프로디지 등 그 이름만으로 세상을 쩌렁쩌렁 울리는 세계적인 팀들이 총출동할 예정이었다. 록 팬들의 기대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운명의 7월 31일, 이들을 만날 꿈에 부플어 인천 송도 공연장에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몰려들었찌만 불행히도 하늘은 우리편이 아니었다. 집중호우가 올 것이라던 예보가 틀리기를 모두 바랐지만 불행히도 그 잘 틀리던 일기예보가 이번에는 맞았다. 거의 폭우에 가까운 집중호우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공연장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무대에 오를 예정이었던 밴드들은 아예 공연을 취소하거나 혹은 무대에 올랐더라도 쏟아지는 폭우를 이기지 못하고 금방 공연을 중단하고 내려와야만 했다. 전설의 우드스탁 때도 비가 왔다고 자위하며 기다렸지만 하늘이 뻥 뚫린 듯 엉망이 되고 둘째 날 공연은 전면 취소되기에 이르렀다. 한국판 우드스탁이 꿈은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
  1999년 7월 31일, 그날의 처절한 실패는 한국 록 역사의 회한으로 남았지만, 시간이 흘러 2006년부터 시작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과 2009년부터 시작된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이 한국판 우드스탁의 꿈을 이어가고 있다.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대한민국 땅의 최초의 록 페스티벌에었던 트라이포트. 비록 하늘의 무심함으로 그 꿈들은 좌절되었지만, 당시에 라인업은 완전 후덜덜하다. 시작이 이렇게 고난으로 시작되었으니, 그 뒤를 이은 펜타나 지산은 성황리에 늘 진행되고 있다. 역시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성대하리라!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스무살의 011 TTL. 추억 돋소! 실황! 트라이포트에서 <Smoke on the water>연주 하시는 딥 퍼플 형님들! 비가 와도 끄떡없는 그들의 rock spirit. 


2013-07-30

7월 30일

1975년_피터 가브리엘의 제네시스 탈퇴


제네시스
「Trespass」
  제네시스(Genesis)의 활동은 피터 가브리엘(Peter Gabriel)이 재적했던 1기와 그가 탈퇴하고 필 콜린스가 주도했던 2기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 두시기의 제네시스는 음악적으로도 큰 차이가 난다. 피터 가브리엘 재적시에 다소 실험적인 프로그레시브 록 사운드를 선보였던 제네시스는 그가 탈퇴하고 필 콜린스가 주도권을 잡은 이후로는 보다 대중적인 팝 록사운드로 음악적 방향을 틀었다.
  그 분기점이 된 해는 1975년. 1975년 7월 30일, 피터 가브리엘이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제네시스를 탈퇴했음을 공식 인정했다. 이로써 얼마 전 피터 가브리엘이 제네시스를 탈퇴했다고 특종 보도했던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NME)'의 보도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피터 가브리엘은 이미 1974년 치러진 투어를 마지막으로 제네시스를 사실상 탈퇴한 상태였다.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피터 가브리엘


필 콜린스

제네시스의 보컬이었던 피터 가브리엘, 그리고 드러머였던 필 콜린스(중,후기에는 보컬까지도). 제네시스는 영국 상류층의 동창들이 만든 밴드라고 한다. 필 콜린스는 원래 다재다능하여 보컬, 드럼 심지어 연기까지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나, 피터 가브리엘의 보컬의 영향력으로 그는 코러스정도에만 그쳤다고 한다. 제네시스의 음악은 프로그레시브 락의 교과서라고 일커진다. 킹 크림슨(King Crimson)이 실험적인 측면에서 프로그레시브락의 특징을 상징한다면 제네시스는 화려하고 난해한 연주와 극적인 전개, 곡의 메시지, 컨셉 앨범 등의 일반적은 프로그레시브락의 특징을 실제 곡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구현하는지를 천재적으로 제시하였다. 즉, 프로그레시브락의 방법론을 구체화시킨 밴드이다. 이태리의 수많은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들이 제네시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말그대로 창세기같은 밴드이다.

2013-07-29

7월 29일

1946년_찰리 파커, 약에 취해 최고의 명연을 선보이다

찰리 파커
「Bird Lives」
  1946년 7월 29일은 재즈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 중 하나로 전해 오는 이른바 <러버 맨(Lover Man)>의 녹음이 있었던 날이다.
  재즈사에 빛나는 색소폰의 거장 찰리 파커(Charlie Park)의 삶은 질곡의 삶이었다. 그의 삶은 언제나 술과 마약으로 찌들어 있었다. 1946년에 찰리 파커는 미국 서부 지역에 머물고 있었다. 콘서트를 위해 당시 유명한흥행주였던 노먼 그랜츠가 이끄는 밴드를 따라 서부에 왔던 찰리 파커는 무슨 이유에선지 콘서트가 끝나고 다른 멤버들이 모두 동부로 돌아간 후에도 여전히 서부에 남아 있었다. 그는 그저 밤거리를 배회하고 작은 클럽을 찾아 즉흥적인 잼 세션을 벌이고 마약을 구하기 위해 뒷골목을 헤매며 방황하고 있었다. 마침 그 지역의 작은 레이블인 다이얼에서 레코딩 계약을 제의했고 약을 살 돈이 필요했던 찰리 파커는 별 생각 없이 다이얼의 제의를 승낙했다.
  그리고 1946년 7월 29일, 찰리 파커는 녹음에 들어갔다. 그러나 약물 중독과 이에 따른 정신분열이 심해지면서 찰리 파커는 녹음을 마친 직후 그만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녹음을 끝마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을 정도. 간신히 의식을 회복한 찰리 파커는 겨우 호텔로 돌아왔지만 담뱃불을 켠 채로 잠이 들었다가 호텔에 불을 내는 사고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그는 오랫동안 정신병원 신세를 져야 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날의 녹음은 찰리 파커의 생애 최고의 명연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찰리 파커의 디스코그래피에서 최고의 명반으로 평가받는 유명한 앨범 「Lover Man」이었다.
  찰리 파커의 오리지널 곡과 유명한 재즈 스탠다드 곡들이 적절히 혼합된 두 장짜리 앨범 「Lover Man」에서 찰리 파커는 약에 취한 상태에서도 절정의 연주력을 선보였는데 특히 「Lover Man」은 발라드에 능했던 찰리 파커의 장점이 극대화되어 나타나고 있는 명반이다.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찰리 파커
루이스 암스트롱
듀크 엘링턴

  
뮤지션과 약물은 떼어낼 수 없는 관계. 마치 술에 취해 사람의 언변이 조금이나마 뛰어나지듯이, 약물의 힘으로 자신의 역량이상을 발휘코자 하는 욕심(?)같은 것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 방법이 의도를 했던 의도를 하지 않았던 간에. 찰리 파커와 루이스 암스트롱, 듀크 엘링턴은 재즈의 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있는 3대 인물로 꼽힌다. 재즈는 브라스와 피아노가 없었다면 그리고 그것을 능숙하게 다룰줄 아는 그들이 없었다면, 영원히 그 자리에 머물렀을 것이다.

Suwon

Today i was riding a bike with my friend Seungjun.  we went from seohyun  to suwon. 
왕복 40km의 자전거라이딩. 마냥 17살때의 철없던 그 시절, 순간으로의 회귀. 훌륭한 하루. 미래에 대한 정진을 이야기할 나이. 패기는 살아있다. we are alive. Live forever.

2013-07-28

7월 28일

1979년_영원한 직장인들의 찬가
<I don't like Mondays>

밥 겔도프 & 붐타운 랫츠
「Loudmouth」
  직장인, 노동자들에게 월요일이 싫은 것은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인지상정인가 보다. 영국 록의 자존심 스미스(Smith)는 <Blue Monday>라 노래했고 1980년대의 인기 여성 그룹 뱅글스는 <Manic Monday>라 노래했다.
  하지만 월요일이 싫은 직장인들의 영원한 찬가는 따로 있으니 붐타운 랫츠(Boomtown Rats)의 <I don't like Mondays>가 UK 싱글 차트 정상에 올라 4주간 머물렀다. 붐타운 랫츠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펑크와 뉴 웨이브의 시대를 아우르며 나름대로는 꽤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지만 영국에서의 인지도에 비해 미국 시장에서의 성격은 다소 미미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붐타운 랫츠는 밥 겔도프(Bob Geldof)가 재적했던 그룹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억할 만한 가치가 충분한 그룹이다.
  밥 겔도프, 붐타운 랫츠의 보컬리스트였던 그는 뮤지션으로서보다는 오히려 각종 자선공연의 산파역을 담당했던 인물로 팝 음악사에 뚜렷한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밴드 에이드(Band Aid)와 <Do they know it's Christmas>,라이브 에어드(Live Aid)가 모두 그의 기획과 노력으로 성사된 작품들이었다. 그 공로로 밥 겔도프는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올랐고 자서전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영국 황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기도 했다.
  그런데 <I don't like Monday>가 탄생한 배경을 살펴보면 직장인들의 찬가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1979년 1월 29일, 샌디에고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16살 여학생이던 브렌다 스펜서가 집 앞 초등학교에 총을 난사해 2명이 죽고 9명이 다치는 비극이 초래된 것. 그녀는 범행동기를 묻는 질문에 "그냥 월요일이 싫었다...(I don't like mondays...)"고 태연하게 대답해 다시 한 번 세상을 경악시켰다. <I don't like Mondays>는 바로 이 사건을 다룬 노래다.
  1979년 7월 28일, 밥 겔도프가 이끌었던 붐타운 렛츠가 노래한, 이유야 어찌됐건 이제는 영원한 직장인들의 찬가로 남은 <I don't like Mondays>가 UK 싱글 차트 정상에 올랐다(4주간 수성).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붐타운 랫츠

  
한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이 어찌되었건, 이미 월요일은 모든 사람들의 저주의 날로 변한 것이 사실이다. 한 주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기대감대신, 아...라는 한숨부터 나오는 한 주의 시작. 뮤지션으로써 노벨평화상 후보에 밥 겔도프와 함께 U2의 보노가 올랐었지.2011년이었던가. 여하튼. 그리고 영국왕실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은 양반이 엘튼 존. 참 대단혀. 이 동영상은 밥 겔도프와 보노가 함께 한 레드 캠페인 관련 동영상. 
U2의 보노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고한다. 아프리카 부채탕감 운동을 비롯한 많은 자선활동을 해온 보노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제품에 스페셜 에디션을 도입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내었고, 그래서 시작된 캠페인이 '(Product)RED'. 'RED'가 부착된 상품을 구매하면, 구매액의 일부를 글로벌 펀드에 기부가 된다. 그리고 그 돈은 아프리카 여성과 아이의 에이즈, 말라리아 퇴치 등에 쓰이게 된다고 한다. 여하튼 이런 것도 조금씩 관심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2013-07-27

하루

하루하루를 의미있게 살아가기 위해서 누군가의 영혼을 신께 바쳐야 한다면
그 영혼을 끼꺼이 바치겠노라고 과거에는 이야기하였거늘.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난 날의 영혼을 되살릴 수 있을까 하는 의문.
그래도 살려야지. 지난 날의 영광은 살리지 못하더라도 영혼만은 살려야 한다.
갑자기, 정말 갑자기, 그러하다고 생각이 든다. 지금 이 순간.



Francis Bacon self-portrait 1970

7월 27일

1999년_걸출한 기타리스트의 소박한 공연


버나드 버틀러
「People Move On」
  1999년 7월 27일, 버나드 버틀러(Bernard Butler)가 홍대 앞 라이브 클럽 스팽글에서 공연을 가졌다. 버나드 버틀러가 누구인가! 브릿팝 씬의 가장 매력적인 밴드 중 하나인 스웨이드(Suede)의 기타리스트로 보컬리스트 브렛 앤드슨과 함께 스웨이드의 절반 이상을 담당했으며 동시대 영국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꼽히던 거물 기타리스트다.
  하지만 1999년 7월 27일 그의 공연은 그 흔한 누구누구의 내한공연이라는 포스터 한 장 나붙은 것 없이 철저하게 비공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만한 거물급 아티스트가 사진 홍보도 전혀 없이 그것도 정식 공연장도 아닌 작은 라이브 클럽에서 비공식적으로 즉흥적인 공연을 펼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
  글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믿고 싶다) 버나드 버틀러는 뒤늦게 그의 내한 사실을 알게된 국내 한 음악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에 팬이 많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고 음악인으로서 팬들에게 보답하는 길은 공연뿐이라고 생각해서 한국을 찾았다"고 대답했다.
  그때까지는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알려진 뒷얘기가 더 재밌는데 실은 버나드 버틀러가 클럽의 주인과 내기를 했는데, 내기에 져서 공연을 하게 된 것이라고. 당시 버나드는 게임을 해서 자신이 이기면 술값을 면제받고 지면 클럽에서 공연을 펼치는 조건으로 내기를 걸었었다고 한다.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브렛 앤더슨 & 버나드 버틀러
더피
「Rockferry」
  
NWE라는 음악잡지에서 기타리스트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갔었던 그는 곳 스웨이드의 기타리스트가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희대의 명콤비들(레논 & 매카트니, 믹 제거 & 키스 리차드, 모리씨 & 자니 마 등등)과 비견될만하 세상의 또 하나의 콤비가 나타난다. 1집과 2집은 브렛과 버나드가 함께 활동을 하였지만, 2집이후 버나드는 스웨이드를 탈퇴한다. 이 수려한 외모들 좀 보소. 버나드 버틀러는 밴드 초기에 투어를 하고 잘 나갈 때, 연일 파티만 하던 다른 멤버들과는 달리 혼자만의 방을 쓰고, 고독을 씹던 사나이. 그리고 그 방에서 미친듯이 기타만 쳤다는 후문이 있다. 현재는 오히려 프로듀서로써 더 각광받고 있는 사나이. 아마 그가 프로듀싱한게 Duffy의 「Rockferry」라지 아마? <Mercy>가 있는 그 앨범 말이야!

2013-07-26

7월 26일

1986년_뉴튼 패밀리와 <Smile again>,
그리고 재미있는 몇 가지 얘기들


뉴튼 패밀리
「I Love you」
  뉴튼 패밀리(Newton Family)와 <Smile again>. 우리로서는 잊을 수 없는 이름과 노래다. 1986년 7월 26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최고의 화제는 단연 엔트리로 참가한 뉴튼 패밀리였다. 헝가리 출신의 혼상 그룹 뉴튼 패밀리는 한국에서는 이미 <Smile again>과 함께 최고의 스타였으니 말이다.
  한국형 발라드의 전형이라 할 <Smile again>은 서방에서는 1980년 영화 '예스터데이'의 주제곡으로 처음 소개되었다. <Smile again>이 뒤늦게 국내에서 전파를 타기 시작하자 대중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뜻하지 않게 먼 동방의 나라 한국에서 자신들의 노래가 큰 히트를 기록하자 뉴튼 패밀리도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1985년 국내에는 물론 처음으로 소개된 그들의 공식 앨범 「Jumpy Dance」에 <Smile again>을 한국어로 불러 수록하는 성의를 보였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헝가리가 공산권 국가로 적성국가(비수교국) 가수의 노래를 금지하고 있었던 당시의 심의규정상 엄격하게 말하면 <Smile again>은 금지곡이었다는 사실. 그러나 애초에 <Smile again>이 헝가리어가 아닌 영어로 불러졌고 한국어로 번안되어 불리기까지 한데다 당시 88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화해 분위기까지 일고 있던 터라 <Smile again>은 암묵적으로 금지곡의 굴레를 벗고 끊임없이 전파를 탈 수 있었다.
  1986년 7월 26일, 서울국제가요제 참가를 위해 마침내 한국 땅을 밟은 뉴튼 패밀리는 참가곡인 <Love is magic>으로 우수 가창상을 수상하며 대상을 수상한 도메닉 알렌 & 테리우드보다도 더욱 높은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참가 후에는 단독 콘서트까지 가지며 한국인들의 뜨거운 성원에 보답했다.
  헝가리와 관련해서 기억해야 할 재미있는 그룹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징기스칸(Genghiskhan). 국내에서 크게 인기를 끌었고 나미에 의해서 번안되어 불리기까지 했던 히트곡 <Genghiskhan>의 주인공 징기스칸 역시 헝가리와 독일 출신 멤버들로 이루어진 그룹이었다. <Genghiskhan> 역시 애초에는 금지곡이었는데 금지 이유는 재미있게도 비수교국인 몽골의 황제를 찬양한 내용의 노래였다는 것(몽골이 고려를 침략했었다는 과거의 역사도 암묵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뒷얘기도 있다.)
  뉴튼 패밀리의 에바(Eva)와 징기스칸의 만도키(Mandoki)는 함께 서울 올림픽을 기념해 <Korea>라는 노래를 취입하기도 했으니 두 그룹은 어느모로 보다 우리와는 인연이 각별한 그룹임에 틀림없다. 후에 우리가 가장 먼저 정식으로 수교를 맺게 되는 동구권 국가가 헝가리였던 것은 우연일까?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뉴튼 패밀리

징기스칸



  
일단 두 그룹 모두 또다른 공통점은 엄청난 인원수로 승부한다는 것. 저 당시에는 남녀혼성 그룹도 하나의 트렌드 였다고 한다.


아 징기스칸의 징기스칸은 진심 희대의 명곡이다. 고1때 열광했었다. 아이들과 케리비안 베이를 가기 전에 무진장 들었다.  간만에 들려오는 저 정갈한 왠지모르는 전율. 마치 구시대의 병맛의 끝을 보여주었으나 중독성은 일품이라는. 역시 위대하다. 징기스칸은 위대한 것이다.......진심, 1980년대 우리나라 역시 엄청난 굴레속에 있던 저 타락한 사회를 보라. 얼마나 수치스러운가. 비수교국 국가라서 노래를 못 틀어주는게 말이되나. 그러나 법도 뛰어 넘는게 음악이랄까. 위대하다. 위대하다.

2013-07-25

ebs space 공감



오늘은 함께 ebs space 공감을 방청했지. 10년에 지산에서 봤던 그들을 다시 보았지. 그곳에서 다시금 하여금 너도 공감하고 나도 공감하고 우리는 공감했고, 노래를 들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 멋졌어. 

7월 25일

1965년_밥 딜런의 변신, 포크에서 포크 록으로


밥 딜런
「The Essential Bob Dylan」
  1965년 열린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는 이변이 일어났다. 포크계의 맹주로 그동안 꾸준히 어쿠스틱 기타에만 천착해왔던 밥 딜런(Bob Dylan)이 이날 놀랍게도 전자기타를 들고 무대에 오른 것이다. 포크 팬들은 경악했다. 배신감에 휩싸인 팬들은 야유를 보냈으며 일부는 퇴장해버리기까지 했다. 그만큼 일렉트릭 기타를 손에 든 밥 딜런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밥 딜런의 변신은 사실 전혀 엉뚱한 헤프닝은 아니었다. 밥 딜런과 피터 폴 & 메리(Peter Paul & Mary)가 주도하던 포크 음악은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미국 내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1964년 비틀스가 미국에 상륙하고 비틀스의 열풍이 미국을 휩쓸기 시작하자 포크 진영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포크 진영의 수장격이었던 밥 딜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그는 훗날 비틀스의 음악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대중들의 선호는 분명히 바뀌어 가고 있었다. 어쿠스틱 기타와 하모니카에 모든 것을 걸었던 정통 포크는 이제 낡은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며 포크도 이제 과거를 뛰어넘는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주어야만 했다. 포크 진영이 일렉트릭 기타를 받아들인 것은 그런 의미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1965년 7월 25일, 밥 딜런이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전자기타를 들고 등장한 것은 그런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일대 사건이었다.
  결과적으로 밥 딜런의 변신은 성공적이었고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많은 동료, 후배 뮤지션들이 밥 딜런의 뒤를 따랐고 포크는 영역을 확장하며 발전을 향한 새로운 길을 열었다. 대표적인 포크 록 그룹인 버즈(The Byrds)가 밥 딜런의 원곡에 일렉트릭 사운드를 입힌 <Mr. Tambourine man>과 <Turn turn turn>을 앞세워 선봉에 나섰고 더 밴드(The Band), 마마스 & 파파스(Mamas & Papas)등의 명 그룹들이 뒤를 이었다. 밥 딜런의 오랜 친구로 여성 밥 딜런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존 바에즈(Joan Baez) 역시 그런 흐름에 동참했다. 바야흐로 포크 록(Falk Rock)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한 3년 즈음인가, 군 입대를 바로 직전에 두고 밥 딜런의 <Like a rolling stone>을 들으면서 여지 껏 살아온 삶에 대해서 회고를 해본 적이 있으나, 그냥 그랬을 뿐이다. 어떠한 의미 또한 찾지를 못했다. 일단 밥 딜런은 롤링스톤紙 선정 세계 500대 앨범 중 무려 9개나 랭크되어있다(추후 무슨 앨범인지 쓸 기회가 있다면 쓰겠다). 하긴 이 양반처럼 한 길만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진득허니 하는 것도 어렵지. 끈기왕이야.끈기왕.

2013-07-24

7월 24일

1976년_유투 이전의 아일랜드 대표선수 
 씬 리지의 미국시장 공략


씬 리지
「Jailbreak」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록 그룹을 꼽으라면 누구나 U2를 꼽을 것이다. 하지만 U2에 앞서 세계 시장에 이름을 알렸던 밴드가 있었으니 바로 씬 리지(Thin Lizzy)다.
  씬 리지를 이끌었던 인물은 베이시스트 겸 보컬리스트였던 필 리놋(Phill Lynott).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으로 시인이기도 했던 그의 감수성은 록 음악에 독특한 정감을 불어넣었고 이것이 씬 리지 음악의 최대 매력이었다. 신 리지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은 게리 무어(Gary Moore). 한국인이 유독 좋아하는 기타리스트인 게리 무어는 필 리놋의 절친한 친구로 한때 씬 리지에 재적했었다. 게리 무어 역시 아일랜드 출신으로 정확히는 북아일랜드 벨파스트가 그의 고향이다.
  고국인 아일랜드에서 성공을 기반으로 영국으로 건너가 주로 영국에서 활동했던 씬 리지가 미국으로 진출해 세계 시장에 이름을 알린 것은 1976년 발표한 앨범 「Jailbreak」와 함께였다. 앨범은 빌보드 앨범 차트 18위까지 오르는 히트를 기록했고 특히 싱글 <The boys are back in towm>은 17주 동안 빌보드 싱글 차트에 머물며 1976년 7월 24일 12위까지 오르는 히트를 기록했다. 이것이 씬 리지가 미국 시장에서 거둔 최고의 성적.
  씬 리지의 음악은 분명 록 음악이었지만 그러면서도 그 안에 아일랜드 전통 음악인 켈틱의 요소를 녹여놓아 그들만의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씬 리지의 최대 히트곡 중 하나인 <Whiskey in the jar>는 아예 원래 켈틱 민요였던 것을 록 넘버로 리메이크한 것.
  U2 이전에 아일랜드를 대표했던 그룹 씬 리지. 1983년 갑작스런 해산과 1986년 그룹의 핵이었던 필 리뇻의 죽음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지만 그들이 남겨놓은 <Boys are back in town>과 한국인이 사랑한 발라드 <Still in love with you>의 음악적 향기는 영원히 남아 있다.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씬 리지
레드 제플린

  
위의 씬 리지의 사진만을 본다면 문득 레드 제플린의 향기가 난다. 레드 제플린 또한 멤버의 죽음으로 그들의 밴드는 와해됐었지만, 다시금 재결합하였고, 그들의 재결합의 성과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는 못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에 있어서 '왕년에'라는 말을 줄곧 붙인다. 자신들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 그렇다. 영광은 존속되지 않는 것이 현재이다.

2013-07-23

7월 23일

1920년_파두의 여왕, 아말리아 로드리게스 출생


아말리아 로드리게스
「The Art Of Amalia」
  포르투갈 하면 무엇부터 생각이 나시는가? 한때 스페인과 더불어 세계를 호령했던 최강 대국이었지만 지금은 옛 영광을 다 잃고 쇠락한 유럽의 변방국가의 이미지, 혹은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그 옛날 월드컵에서 한국을 물먹였던 포르투갈의 검은 표범 에우제비오나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인 루이스 피구가 생각날지도 모른다.
  음악쪽에서 본다면 포르투갈의 전통 음악 파두와 파두의 여왕 아말리아 로드리게스(Amália Rodrigues)가 먼저 떠오른다. 파두, 포르투갈의 전통 음악인 파두는 한마디로 슬픈 음악이다. 듣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눈물이 글썽거려질 만큼 파두는 슬프다. 파두에 배어 있는 슬픔은 이베리아 반도의 끝자락에 위치한 작 나라 포르투갈의 지리와 역사에서 기인한 것으로 해석된다. 주로 바다 위에서의 활동을 통해 삶을 꾸려갔던 포르투갈인들에게 바다는 동경이자 두려움이었다. 배를 타고 넓은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부지기수였을 테니 바다로 떠난 이들을 기다리며 주로 여인들이 불렀던 노래가 바로 파두였다. 그러나 그들이 불렀을 노래에 슬픔이 묻어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 운명, 숙명을 뜻하는 라틴어 'fatum'에서 유래했다는 파두(Fado)라는 용어 자체에서부터 그런 느낌은 이미 감지된다.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는 파두의 여왕이며 포르투갈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았던 월드뮤직의 빅 스타였다.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는 1920년 7월 23일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치명적인 슬픔, 절대 고독, 영혼의 절규 등과 같은 과격한(?) 수식어가 따라붙는데 그만큼 그녀는 파두가 머금은 슬픔의 정수를 표현한 가수였다.
  여기에는 파두의 기본적인 슬픔 외에도 극빈 가정에서 어렵게 자라난 그녀의 가정환경이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녀의 대표곡은 돌아오지 않는 연인을 기다리는 애끓는 심정을 노래한 <Barco Negro(검은 돛배)>, 파두하면 이 곡이다 할 만큼 유명한 곡이다.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담배를 피고 있는 아말리아의 모습을 보니, 문득 한 두어달전 소설가 이제하 선생이 페이스북에 썼던 글귀가 생각난다. 대충 담배피는 여자에 대해서 선생의 생각을 멋스럽게 표현한 글이었던 것 같다.

'남녀가 섞여 수다떠는 자리에서 가끔 느끼는 건데 뭐라 열변을 토하고 있는 여자보다 말없이 담배나 피고 있는 여자가 왜 더 돋보이는지 짐작할만하다. 왈왈대는 여자는 뭘 하면서 자랐는지 몰라도 담배피는 여자는 쪽마루에 멀뚱멀뚱 앉아 별이나 헤던 아이였으리라.ㅎㅎ'

2013-07-22

7월 22일

1979년_리틀 리처드의 변절

리틀 리처드
「Good Golly Miss Molly」
  리틀 리처드(Little Richard)는 1950년대 로큰로르이 시대를 화려하게 빛낸 최고의 흑인 스타였다. 1955년 <Tutti frutti>로 시작된 그의 화려한 이력은 <Long tall Sally>, <Jenny Jenny>, <Keep a knockin'>, <Good Golly, Miss Mollly>로 이어졌다. 모두가 로큰롤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명곡들이다.
  당시 리틀 리처드는 섹슈얼하고 폭발적인 무대 매너로도 화제를 모았다. 리틀 리처드는 미국은 물론 호주와 유럽을 돌며 정력적인 투어를 벌였는데 특히 1960년대 펼쳐진 영국 공연에서는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의 서포트를 받으며 자신의 음악적 위상을 뽐내기도 했다.
  리틀 리처드는 분명 로큰롤 전성기의 최대 공로자이자 최대의 수혜자이기도 한 인물이었기에 그의 변절(?)은 뜻밖이었다. 1957년 갑작스런 기독교의 귀의를 선언하며 팬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돌아온 그는 1976년 다시 한 번 기독교로 돌아가 이번에는 목사가 되었다. 하긴 그가 처음 노래를 부른 것이 어린 시절 교회 성가대의 일원으로 가스펠을 부른 것이었으니 여기까지는 그래도 이해가 된다.
  그런데 이건 어떤가? 1979년 7월 22일, 캘리포니아주 노스 리치몬드 교회에서 열린 부활집회에서 리처드 페니먼(Richard Penniman)목사는 로큰롤의 사악한 위험성에 대해 역설하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로큰롤은 세상을 악으로 물들이는 사탄이었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If God can save an old homosexual like me, he can save anybody(하나님이 나처럼 늙은 호모섹슈얼을 구원할 수 있다면 누구든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리처드 페니먼. 이것이 리틀 리처드의 본명이다. 한때 로큰롤의 전도사였던 그가 로큰롤을 사악한 것으로 매도한 것은 그래도 너무하지 않나!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리틀 리처드의 외모를 보고 더욱더 놀랐다. 왜이렇게 잘생겼나? 종교의 귀의는 때로는 그들의 창작욕과 창작력마저 떨어뜨릴 수 있다. 김승옥선생과 오정희선생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리틀 리처드도 그럴 것이다. 젊은 시절 촌철살인급의 소설들을 창작해냈지만, 그들은 종교로 귀의하면서 과거의 영광을 되새김질할 수 있는 그런 필력을 잃은지 오래이다. 늙으면 점차 보수화된다고 하였던가. 문득 늙기 싫다. 없는 생각마저 귀찮아질 것같아서 두렵다.
김승옥
오정희

2013-07-21

7월 21일

1947년_캣 스티븐스라 불렸던 유서프 이슬람 출생

캣 스티븐스
「Foreigner」
  1947년 7월 21일 캣 스티븐스(Cat Stevens)가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리스인 어머니는 스웨덴인. 런던에서 멀쩡히 대학까지 마친 그가 켈틱 민요를 포크로 녹여낸 <The morning has broken>, 후일 미스터 빅의 리메이크로도 히트하게 되는 <Wild world> 등을 히트시키며 포크 스타로 활동할 때까지만 해도 그에게서는 그 어떤 극적인 변신의 단초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어느 날 갑자기 그야말로 충격적인 변신을 감행했다. 1978년에 캣 스티븐스는 갑자기 이슬람에 귀의했고 이름마저 아예 유서프 이슬람(Yusuf Islam)으로 바꿔버렸다. 그리고 제목도 의미심장한 「Back To Earth」를 마지막 앨범으로 세상에 던져놓은 채 홀연히 사라졌다. 물론 비틀스를 비롯한 많은 서양 팝 스타들이 인도 사상에 심취한 예도 있었고 비근한 예로는 비래드 피트나 리처드 기어 등 유명 배우들이 티베트 종교에 빠져들기도 했지만 캣 스티븐스만큼 갑작스럽고 과격하게 사라져버린 이는 없다. 한순간에 모든 미련을 벗어 던지고 팝계를 떠난 그는 철저한 은둔 생활에 돌입했는데 심지어는 그 뒤로 그를 봤다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그는 정말 홀연히 사라진 것이다.
  현재 시점으로 말한다면 그는 캣 스티븐스가 아니라 유서프 이슬람이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살짝살짝 활동을 개시하고 있지만 여전히 캣 스티븐스 대신 유서프 이슬람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물론 음악 스타일도 과거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이라크전에 참전한 자신의 옛 조국 영국에 대해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때 이슬람계 테러 용의자 선상에 이름을 올려놓기도 했던 그가 말이다.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사람은 때로는 있는 모든 것을 두고 홀연히 떠날줄도 알아야 한다. 미스터 빅의 <wild word>의 원곡자라니. 역시 처음안 사실이다. 오늘은 이 원곡을 들어봐야겠다. 홀연히 떠나는 것도 하나의 용기이다. 과연 이 세상에는 용기있는 자들이 몇명이나 될까? 물론 나도 용기가 없지만 말이다. 

2013-07-20

북한강 자전거 종주 대모집

싸이클왕 렌스 박과 함께 북한강 자전거 종주 하실 분 대모집합니다.
당일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에 돌아올 예정입니다. 날짜는 아직 미정이고 주중내지 주말 날 하루잡아 갈 예정입니다. 남녀노소 불문 두 다리와 자전거만 있다면 누구나 가능.
북한강 코스는 약 133km정도이며 야탑에서 전철을타고 광나루 지점부터 시작하여 팔당대교를 건너 북한강코스 종주를 할 것입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렌스 박 경력 ; 전국 11626번째 국토종주자(인천~부산 정복)

7월 20일

1947년_라틴 록의 최고봉 카를로스 산타나 출생

산타나
「Abraxas」
  산타나(Santana)는 원래 그룹의 이름이지만 사실상 카를로스 산타나(Carlos Santana) 개인과 동일시 해도 무방하다. 그만큼 카를로스 산타나는 산타나의 처음이자 끝이다. 라틴 록의 선구자 카를로스 산타나가 1947년 7월 20일 멕시코의 아우틀란 데 나바로에서 태어났다. 1962년 가족과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그는 1966년 산타나 블루스 밴드를 결성해 음악 활동을 시작했고 1967년 그룹의 이름을 산타나로 바꾸었다.
  1969년 우드스탁 무대에서 <Soul sacrifice>를 연주해 주목받은 산타나는 <Jingo>, <Evil ways> 등이 수록되어 있었던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으로 라틴 록의 도래를 선언했다. 1970년 발표된 2집 앨범 「Abraxas」는 라틴 록의 전형을 보여준 라틴 록 최고의 마스터 피스. <Black magic woman/Gypsy queen>, <Oye como va>, <Samba party> 등 라틴 록의 명곡들이 수록된 「Abraxas」는 세월이 흘러도 향기를 잃지 않는 라틴 록 최고의 앨범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30년 넘게 산타나는 약간의 굴곡이 있긴 했지만 라틴 록 최고봉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다. 그랬던 산타나였기에 그가 20세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리키 마틴에서 촉밝되어 마크 앤소니, 제니퍼 로페즈로 이어져 내려온 라틴 팝 전성기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롭 토머스 등 많은 후배들의 도움을 받은 산타나는 앨범 「Supernatural」과 싱글 <Smooth>를 앞세워 빌보드 차트와 그래미를 석권하며 자신이 왜 라틴 록의 지존인지를 확시히 보여주었다.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산타나의 25집「Supernatural」은 2000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9개 부문을 석권한 가치있는 앨범이다. 나이에 걸맞지않게 이 시대의 음악을 정확히 파악한 앨범이라고 자평하고 싶다. 용필형님의 「Hello」가 생각이 난다. 그렇다. 그들은 전설로써 남아있는 것이다. 영광이다. name value를 뛰어넘는 말하지 못할 아우라를 지닌 자가 됩시다. 우리들. 모두.

2013-07-19

7월 19일

1976년_짙은 자주빛, 그 빛을 다하다

딥 퍼플
「Deep Purple In Rock」
  1976년 7월 19일 하드록의 전설 딥 퍼플(Deep Purple)이 해체를 공식 발표했다. 1968년 데뷔한 이래 「Deep Purple In Rock」, 「Fireball」, 「Machine Head」 등 하드록의 역사에 빛나는 명반들을 줄줄이 선보이며 최강의 그룹으로 군림했던 딥퍼플의 고고한 짙은 자주빛이 그 빛을 다한 것이다.
  딥 퍼플의 역사는 사실상 하드록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딥 퍼플은 키보디스트 존 로드(Jon Lord)가 그룹내 음악적 주도권을 쥐고 있던 초창기에는 프로그레시브 록의 경향을 보이기도 했지만 불세출의 기타리스트 리치 블랙모어(Ritchie Blackmore)가 주도권을 잡은 이후로는 분명한 하드 록의 방향을 선회했다. 그리고 하드 록을 대표하는 명곡인 <Smoke on the water>, <Highway star>, <Child in time>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레드 제플린에 필적하는 하드 록의 최고봉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그런가 하면 딥 퍼플의 역사는 멤버들의 이합집산의 역사다. 그만큼 멤버의 변화와 부침이 심했다는 얘기다. 보컬리스트의 변화에 따라 로드 에반스(Rod Evans)가 재적했던 1기와 이언 길런(Ian Gillan)이 재적했던 2기, 그리고 데이비드 커버데일(David Coverdale)이 재적했던 3기로 크게 구분되는 딥 퍼플의 역사 속에서 그밖에도 이언 페이스(Ian Paice), 닉 심퍼(Nick Simper), 글렌 휴즈(Glenn Hughes), 그리고 해산 전 딥 퍼플의 마지막 기타리스트로 딥 퍼플 해산 직후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천재 기타리스트 토미 볼린(Tommy Bolin)에 이르기까지 딥 퍼플의 역사를 수놓았던 얼굴들의 면면은 하나하나가 모두 당대 최강의 테크니션들이며 하드 록의 역사를 빛낸 찬란한 별들이다.
  하드 록 역사의 계보를 그려보아도 딥 퍼플이 없이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딥 퍼플을 거쳐간 이들에 의해 생성되고 소멸했던 그룹들을 빼놓고는 도무지 얘기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리치 블랙모어가 딥 퍼플 탈퇴 후 이끌었던 레인보우(Rainbow)와 데이비드 커버데일이 주도했던 화이트 스네이크(White Snake)는 명백히 딥 퍼플의 계보를 잇는 이란성 쌍둥이와도 같은 그룹이다.
  1976년 7월 19일, 화려했던 전성기를 마감하고 일단 날개를 접은 딥 퍼플은 8년이 지난 1984년 그룹의 최전성기로 평가받는 2기 멤버들을 규합해 다시 필드로 돌아왔지만 전성기를 재현할 수는 없었다. 이미 시간은 흘렀고 딥 퍼플도 예전의 딥 퍼플은 아니었다.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형님들의 전성기는 이미 지나갔지만, 나의 전성기는 이제 시작이오. 이언 길런 형님의 목소리로 듣던 <highway star>가 아직도 귓속에서 맴맴돌고, 직진하듯 뭔가 쭉쭉 나아가는 멋진 사람이 되겠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