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30

지구에서의 우리 인간의 감소, 이는 과연 희망의 찬가인가?

 간만에 오지게 흥미롭게 읽은 책. <텅 빈 지구>


   경제학도이자 유통업에 종사하는 1인으로써 그 무엇보다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구에 관련된 경제학일 것이다. 인구의 증가와 관련되서 우려를 표현 것은 이전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의 아주 오래된 생각이었다(인구가 증가하면 토지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 곳에서 나오는 식량은 한정적이고, 이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빈곤과 가난의 빠지게 될 것이라고 예전부터 멜서스는 이야기했다). 오히려 인구 증가에 대한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닌, 인구의 감소가 지구 전반에 끼칠 막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새로운 시각의 책, <텅 빈 지구>에 관련되어 몇 자 적어보고자 한다.


  한국을 비롯한 여러 선진국들은 이미 출생률이 1.X의 시대로 접어든지 오래이다. 실질적으로 오랜 세월과 풍파를 겪은 세대는 아니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자식의 출생에 관련해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도 증가한 것이 사실이다. 농업이 주시대였던 과거, 그 시대에는 '자식의 수=경제력 내지 노동력'으로 평가되었던 것이 당시 사람들의 인식이었다. 사회가 고도화되고, 여성들의 교육기회 증가, 농업인구의 도시로의 이주현상 등이 발생하면서 자식의 수는 개인의 자식의 수는 그닥 중요하지 않은 요소로 전락하고만 것이 사실이다. 자식을 다수 출생하다보면 그로 인한 경제적 비용과 사회적 비용, 그리고 자신의 삶의 질에 투자할 수 있는 자발적 비용들이 자식을 위해 투자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로 인한 한 세대의 경제적 능력과 삶의 질은 향상될 수 있을 것이며, 전반적으로 사회로 확대해보았을 때, 사회적 환경비용의 감소, 더 나아가 개인들은 많은 땅들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지구라는 물리적 크기는 같은 데 인구가 감소하게 되니 당연한 이치 아니겠는가?, 하지만 해당 책은 인구의 감소가 우리 지구의 희망의 찬가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더욱 위험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 책은 엄청 위대한 학술서나 연구용 논문이 아니다. 독자들의 이해를 방해하지도 않는다. 다만 엄청난 사례와 인터뷰, 각국에서 현재 펼치고 있는 제도적 예시 및 실질적인 데이터 바탕을 통해 독자들의 이해를 도운다. 그리고 저자의 주장은 확고하고 명확하다. 인구의 감소는 실질적으로 창의성과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는 기회가 감소된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조금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생각의 파이값'이 작아지는 것이고, 이는 우리가 지금 껏 발전해왔던 것보다 더욱 더딘 발전 혹은 퇴보를 의미한다고 본다.   

  이에 따라서 실질적이고, 다각적인 현재의 정부의 출산장려 정책들이 과연 효과가 있는가? 책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결론적으로는 캐나다의 이민정책을 적극적으로 본보기 삼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이민자들에 대한 민족주의가 앞서는 것이 아닌, 다양성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캐나다는 다양한 역사적인 경험을 통하여 이민자들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현재에도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그 이민자들은 실질적으로 한 국가의 비용을 증대시키는 것이 아닌, 국가의 이익이 되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다양성의 인정, 그것은 너와 내가 다름, 너 자체로서의 인정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유대인 출신의 철학자 E.레비나스는 <시간과 타자>라는 저서에서 '타자성'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타자성이란, 단순히 차이나 다름이 아닌 주체에 의해서 환원될 수 없는 상대 개체의 고유한 속성이다. 타자성의 인정 그것이 한 나라의 경제적 부와 연관될 수 있을 것이다.그것이 한 나라의 미래를 바꿔놓을 수 있는 발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다양성의 인정의 시작이 더욱 새로운 강국을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난 다양한 창의성과 아이디어의 힘을 믿는다.

  그럼 20,000. 끝.

2019-02-17

찰리 채플린, 백남준 그리고 비빔밥



  지난 주, 백남준아트센터에 방문하여 전시를 보지 못한 까닭에 심기일전하여 2월 17일 일요일 그곳에 재방문하였다. 다행히도 전시는 진행중. 꾿.
백남준『미디어 'n' 미데아』展 19.02.16~20.02.20

  그의 작품들을 진실로 제대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과연 이 전시에서 미스터 백형님은 작품들을 통하여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이었을까.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전시실에 들어갔다. 총 17개의 작품 중 나의 사유가 나래가 펼쳐진 작품들이 몇 가지 있었으나 가장 감명 깊게 본 '<찰리 채플린> 2001년 作'에 대한 생각을 몇 글자 이곳에 흔적을 남기고 싶다.

<Charlie Chaplin>
2001, 4 CRT TVs, 4 radio's cases, 1 LCD moitor, 2 bulbs, 1 channel video, color, silent, 185x152x56 cm

  위의 사진이 그의 작품이다. 그림에서 보다시피 총 5대의 모니터에서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와 그의 모습들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그리고 손처럼 보이는 2개의 전구는 그의 영화에서 가스등을 연상시키는 구형 전구가 붙어있으며 이는 마치 흑백영화 시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찰리 채플린은 그의 영화 <황금광 시대>, <모던 타임즈>, <위대한 독재자> 등과 같은 영화에서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인간의 소외의 과정을 꾸준히 보여주었다. 그의 영화들에서 기계문명과 자본부의 사회의 도구로 전락한 인간의 모습은 순전히 하나의 부품의 역할로 등장한다. 그는 처절하게 이러한 역설의 미학을 통하여 물질만능주의와 기계화 시대에 '인간의 소외'. 즉 '인간성 상실'에 대한 모습을 나타낸다. 이는 엄연한 개인의 자율성 침해로 인식될 수 있으며, 크게 생각한다면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라는 이데올로기 내에서 벌어지는 엄연한 폭력이다. 개인의 자율적인 사고를 마비시킨 채 철저하게 사회적 부품으로 전락시키는 모습은 처참히기까지 하다.  
  이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등장하는 '빅브라더'의 모습과 아주 동일하다. '빅브라더'는 기술과 문명의 발달로 인해 철저하게 인간들을 감시하는 장치로 등장한다. 빅브라더의 감시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인간들의 개인의 자율성은 처참하게 파괴되고, 비판적인 사고 또한 마비시킨다.
  이와 관련해서 서구의 많은 철학자들은 그 폭력성에 대해서 고발을 하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진정으로 인간이 비판적 사고를 해야만 하는 많은 사상들이 뿜어져 나왔다. J.P.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그러하고 M.푸코의 권력담론이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의 미스터 백 형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기술과 인간은 충분히 조화를 이룰 수 있으며 인간이 지배가 되는 것이 아닌 그 문명으로 인해 인간의 생활은 더욱 윤택해질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 더불어 기술을 대하는 인간의 긍정적인 모습 그에 대한 찬가를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이러한 생각이 가장 잘 나타난 작품으로 꼽히는 <찰리 채플린>은 기존의 찰리 채플린에게 하는 하나의 답변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백남준의 작품들 속에는 끊임없는 조화와  정체성의 해체 등이 실질적인 주제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그가 서울, 도쿄, 쾰른, 뉴욕을 오가는 코스모폴리탄으로 삶 자체가 자신이 갖고 있는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러한 정체성을 해체하고 그것에 조화를 이루어 또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진정한 융화였던 것이다. 또한 동서양의 격식없는 동등한 시선에서의 만남, 음악과 예술의 조화, 모든 지구는 하나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각기의 문화와 삶의 형태는 다르지만 인간의 본질적인 존엄성은 동등하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것은 우리나라 전통의 음식인 '비빔밥'과 매우 닮아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의 융화, 음양오행의 진리가 비빔밥 속에는 담겨져 있으니까. 비빔밥 속에는 우주의 진리를 담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중심에는 우리의 삶이 있으니까. peace. 

ps. 아주 오랜만에 글을 쓰려하니, 처참하게 써지질 않는다. 다시 화이팅.

2019-02-10

반가워요! 미스터 PAIK!


N129_listening for music 1N129_listening for music 1
 제작연도 / 1963 작가 / 만프레드 몬테베 타입 / Photography Credit Line / 백남준아트센터. 사진:만프레드 몬테베



  유년시절 웅진 출판사에서 나온 월간잡지 '생각쟁이'에서 본 것이 그와의 첫 마주침이었다. 그 당시에 우리나라의 유명한 예술가 한 명으로 소개가 되었었다. 그와 관련된 글을 읽으면서 처음 느낀 것은 우리나라에 별 '희한한 사람'이 다있네라는 것이 어린 시절의 생각이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르고 30대로 접어든 지금 예술에 지대한 관심이 생긴 나는 문득 그에 대해서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그리고 오늘 용인에 백남준아트센터를 방문하였다. 하지만. 휴관. 다음 전시를 위해서 분주하게 준비하는 전시장에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책을 샀다. 그와의 두번째 마주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백남준. 우리나라가 나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비디오아티스트. 비디오아트라는 미술적 사조를 창조한 사람. 20세기에 기술의 총체적 집아라고 평가되는 텔레비전을 가지고 스스로의 예술적 사관과 철학을 철저하게 펼쳐나간 사람이다. 신기하다. 매일 보는 텔레비전이 하나의 미술의 표현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동양과 서양의 융화, 기계와 인간과의 관계맺음, 타자성의 이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진심어린 고찰, 그리고 그 속에서 뿜어나오는 역설적인 사고방식들.  그가 죽은지 10년은 훨씬 더 지났지만 그에 관한 자료들은 한 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한 사람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도구들이 필요하다. 그것이 철학적 자양분이든, 문화인류학적 세계관이든, 혹은 미학이든.

  사실 오늘 많은 사유를 하고 한 편의 글을 쓰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그에 대한 관심이 나에게 지대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조금 더 많은 생각과 성찰, 그에 대한 업적을 생각하고 스스로의 사유를 이곳에 다시 적도록 하겠다. 참으로 기묘한 생각이 들고, 아주 오랜만에 글을 쓰는 것이 그닥 쉽지않다고 다시금 느끼는 하루이다. 우선 그래도 오래간만에 만났으니, 반가워요 미스터 PAIK!

2017-10-09

실로 오랜만이다. 불나방.

나의 것조차 오랜만에 방문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관심이 없었던 터. 간만에 쓴 글들을 돌이켜 보니 한없이 그리고 정처없이 바쁘게 살았다는 생각이 가득하다.그리하여 임시공휴일이자 한글날인 오늘 나는 불속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활활 타오르기 위해 오늘도 출근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다시금 이 블로그에 나의 모든 것들을 적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2015-09-05

간만에 쓰는 일기

 마음의 장벽이 허물어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장벽의 높이는 더욱더 높아지는 것 같다. 삶의 녹록하지 않음을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살아가고 있는 이순간 눈앞에는 한없이 눈물이 맺혀온다. 그간 고단하지 않은 편한 삶을 살아온 나의 과오일까. 중요한 것은 오늘만큼은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싶었고 항상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역할을 도맡아 하고있는 나에게 따스하고 달콤한 말 한마디가 가장 큰 힘이었을 것이다. 예민해질대로 예민해진 지금 입을 가볍게 여는 순간 생명을 잃을 것 같은 자괴감에 빠진다. 모든이들이 알았으면 좋겠다는 단 하나의 명제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남자도 여자만큼 섬세할 수 있으며 혹자는 여자보다 더욱 섬세하다는 것이다.' 섬세했던 밤이 이렇게 지나간다. 내일의 태양은 다시 또 떠오르겠지. 꾿.나잍.

오래간만에 그냥 손이 가는대로 쳤다. 머릿속에 이물질이 침투한것 같다. 이물질의 이질감과 오늘은 꽤나 불편한 잠을 청해보련다. 안녕.


2015-07-08

whisper

장마가 오기 직전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한 여름의 무더움을 벗어나 잠쉬 쉬라는 듯이. 그 바람은 간드러지게 다가오며 나에게 속삭이며 말하는 기분이다.

어느덧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너의 잠자는 숨소리가 이제는 나를 포근하게 감싸주는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이불이 되었구나. 코고는 소리마저도 달달하게 느껴진다. 고맙다. 진실로.

어디로 떠나고 싶냐는 나의 질문에 너는 추운 시베리아로 가고싶다 했다. 그 추운 시베리아를 너는 그토록 왜 그리워하는 걸까. 마음의 무게를 이제 조금은 덜어놔. 추운 곳보다는 따스한게 좋잖아. love & peace.


영화 <이터널 선샤인>


 

2015-04-15

임철우 단편소설 「흔적」에 대한 작품해설 및 감상

죽음에 대한 수용 그리고 마지막 자유의지의 발현
 
이 소설을 채택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인간의 삶의 근본적인 문제로 여겨지는 죽음에 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산자는 죽음에 대해서 논할 자격이 없다. 그들은 죽음을 경험해보지 못하였으니까. 죽음에 대해서 논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은 자만의 특권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인해 죽음에 대해서 추측만을 할 뿐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당신이라는 노년의 인물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과 그것을 맞이하는 준비과정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죽음을 예감한 당신, 그것에 대항하거나 반항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차근차근 마지막 순간을 준비하는 모습은, 노년의 생기를 잃은 모습이 쓸쓸하게 다가오지만 그것은 오히려 차분하게 독자의 마음에 안착한다. 사뭇 경건하기까지 하다.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이라고 인칭을 고집한 작가는 이것이 단순히 당신의 문제가 아닌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개개인이 언젠가는 직면하게 되는 자연의 섭리이자 삶의 커다란 문제라는 것을 인지시키기 위해서 사용한 장치일 것이다.
소설의 제목인 흔적의 사전 상의 의미는 어떤 현상이나 실체가 없어졌거나 지나간 뒤에 남은 자국이나 자취이다. 작가는 왜 이러한 제목을 붙였을까?
소설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다. ‘당신이 자신의 죽음을 덤덤하게 준비하는 부분과 과거 회상 부분으로. , 하루 동안 자신의 죽음을 덤덤하게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이 나타날 뿐이다. 회상에서 당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죽음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이러하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그리고 아내. 이 순서는 단순히 시간적인 순서이지만 모두들 죽음의 형태를 맞이한 인물들로서 당신의 기억 속에 버젓하게 내재되어있다. 이것은 일종의 흔적이다. ‘당신의 기억 속에 내재되어 있는 그들만의 온전한 흔적들이다. 그리고 죽음을 수용하고 있는 당신의 행동은 이러한 기억 속에 내재되어있는 흔적들조차 하나 둘 씩 지우는 행위로 묘사된다.
 
당신은 라이터와 신문지 몇 장을 찾아 들고 나온다. 마당에 붙은 텃밭 가장자리에 쪼그려 앉아 사진첩을 한 장씩 뜯어내기 시작한다. 종이가 두꺼워 쉽게 불이 붙지 않더니, 신문지를 집어넣자 금세 불꽃이 일어난다. 당신은 애써 사진 속의 얼굴들을 외면한 채 실눈을 뜨고 불길을 주시한다. 산간지역에선 가장 무서운 게 불이다. 민가에서 함부로 쓰레기를 태우지 못하도록 불 감시 차량들이 가을부터 봄까지 수시로 순찰을 돈다. 크기도 연대도 다른 수많은 사진들 중 아버지가 세상에 남긴 단 두 장뿐인 사진도 섞여 있다. 어머니, 아내, 아들, 친지들 그리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도 차례차례 재로 변하고 있다. 불현 듯 그것들이 당신의 육신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아니, 당신의 전 생애가 눈앞에서 송두리째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있는 것만 같다.(136)
 
이것이 과거 기억의 흔적들, 즉 뇌리 속에 내재되어 있는 흔적들을 지우는 행위라면, 이를 제외한 부분, 즉 아침부터 밤까지 당신이 살아낸 마지막 온전한 하루의 기록을 간단히 나열하면 이렇다. 그 하루 동안 당신이 한 일이라야 잠을 깨어 간단한 아침을 먹고, 집 안에 남은 짐을 치우고, 뜻밖에 남아 있던 사진들을 태우고, 동물병원에 가서 병든 개를 안락사시키고, 집 근처로 돌아와 죽은 개를 묻고, 역으로 가서 열차표를 사고, 칼국수를 사 먹고, 친구에게 편지를 쓴 다음, 부산으로 가기위해 열차에 오른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어떠한 장애물 없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지만, 그것의 진행 속도는 무언가 차분하고 느릿하며 차근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10년 동안 살던 집에 남아 있는 자신의 모든 흔적들을 지울 수 있는 일들이 아주 수월하게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실질적은 흔적을 지우는 행위로서 기억의 흔적들을 지우는 일의 연장선상이다.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죽음에 대해서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닌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죽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이 두려움은 당신도 이미 느끼고 있다.
 
마지막 순간이 임박했음을 당신은 또렷이 예감하고 있었다. 길 위에서, 아니면 방 안에서. 어차피 당신이 죽음과 조우하는 형식은 그 둘 중 하나일 터였다. 그러나 무심히 걷거나 불시에 길바닥에 쓰러져 개처럼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끔직한 악취와 함께 부패한 시신으로 뒤늦게 발견되는 것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당신 몫의 육신, 그것은 바로 당신 자신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육신을 추악하고 끔찍한 오물 덩어리로 만들어 비정한 타인들의 조롱과 구역질과 가래침을 뒤집어쓰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당신에겐 그 외의 선택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신은 철저히 혼자였다. 이제 당신을 두렵게 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떻게 죽어야 이 초라한 흔적을 지상에 남기지 않을 것인가.(148)
 
그리하여 작가가 당신으로 하여금 꿈꾸게 한 것은 하나의 완벽한 소멸이다. 다음 생에서는 잠시 피었다가 사라지는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가 되고 싶다는 그의 마지막 말처럼, 그는 모든 흔적을 지운다. 조촐하게 지내던 거처와 주변을 정리하는 그의 모습은 죽음이 아니라 실종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죽었다는 흔적조차 없게 만드는, 그럼으로써 비로소 이 세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고 싶어 하는 그의 노력 애처롭게 마저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소멸을 넘어서 필자가 더욱 흥미롭게 여겼던 것은 죽음의 방법을 스스로 택한 당신의 모습이다.
 
바다로 가자, 라고 당신이 결심을 굳힌 것은 두 달 전이었다. (중 략)아아아아아. 울음소리였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사람인지 짐승인지조차도 모호한 그 통곡 소리가 천지를 가득하게 채우며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꿈에서 깨어난 당신은 까닭 모를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밤새도록 당신은 어둠 속에 웅크려 앉아서 그 울음소리에 대해서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보니, 어쩌면 그것의 정체를 알 것도 같았다. 그랬다. 그 울음은 목숨을 가진 지상의 모든 것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그 순간 당신의 뇌리에 뉴스 속 노부부의 모습이 떠올랐다. 당신은 그들이 다시 떠오르지 않기를 바랐다. 바다 밑 깜깜한 심연으로 영원히 가라앉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그리고 새벽 동이 희미하게 터올 무렵, 당신은 그동안 고민해왔던 해답을 마침내 찾았다.(150)
 
위의 구절에서 나타나듯 당신은 스스로 죽음의 방법에 대해서 선택하고 있다. 바다라는 장소를 선택한 것도, 그리고 그동안 고민해왔던 해답을 마침내 찾은 것도 죽음을 맞이하고 흔적을 지우려는 자 당신이 홀로 자유의지에 의거하여 정한 것이다. 이는 스스로가 소멸을 하려는 준비인 동시에 마지막까지 인간으로서의 자유의지를 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마지막까지 정력을 다하여 스스로가 죽음의 방법을 택하고 자신의 의지가 가는대로 선택하였다는 것은 곧 인간은 결국 흔적을 남기기 위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단말마의 비명과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즉 몹시 고통스러운 상태를 맞이하지만(죽음) 비명을 지르는 행위(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하다. 이 소설은 죽음을 맞이하는 당신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두 가지의 형태의 흔적에 대한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숙명론적으로 받아들여야하는 죽음이라는 거대한 자연의 섭리 앞에서는 자신의 기억과 일상에서의 모든 흔적들을 지운다. 오히려 자연으로 돌아감으로써 홀연히 인간은 자연의 일부가 되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죽음의 방법에 대해서는 인간이 스스로 택하게 된다. 이는 일종의 인간이 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자신이 추구하고자하는 것에 대해서 비록 그것이 죽음 앞일지라도 그 방법에 대해서는 택할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세상에 어떠한 모습과 형태로서라도 자신의 존재를 조금이나마 알리고자 하는 즉,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연의 욕망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죽음이 ()’라면 인간의지의 발현은 ()’라 할 수 있다. 결국은 이것은 반대에 있는 것이 아닌 하나의 선상에 있는 것이다. 대자연의 섭리에 적응하며 사는 것이 인간이며, 그러한 인간을 다시 받아주는 곳은 대자연 밖에 없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 두 상황을 공통적으로 맞이할 수 있는 것은 흔적이라는 두 음절의 단어라는 것과 인간은 늙고 병들고 마련이기 때문에 죽음은 때때로 구원일 수도 있는 것, 즉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