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백남준아트센터에 방문하여 전시를 보지 못한 까닭에 심기일전하여 2월 17일 일요일 그곳에 재방문하였다. 다행히도 전시는 진행중. 꾿.
백남준『미디어 'n' 미데아』展 19.02.16~20.02.20
그의 작품들을 진실로 제대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과연 이 전시에서 미스터 백형님은 작품들을 통하여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이었을까.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전시실에 들어갔다. 총 17개의 작품 중 나의 사유가 나래가 펼쳐진 작품들이 몇 가지 있었으나 가장 감명 깊게 본 '<찰리 채플린> 2001년 作'에 대한 생각을 몇 글자 이곳에 흔적을 남기고 싶다.
<Charlie Chaplin>
2001, 4 CRT TVs, 4 radio's cases, 1 LCD moitor, 2 bulbs, 1 channel video, color, silent, 185x152x56 cm
위의 사진이 그의 작품이다. 그림에서 보다시피 총 5대의 모니터에서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와 그의 모습들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그리고 손처럼 보이는 2개의 전구는 그의 영화에서 가스등을 연상시키는 구형 전구가 붙어있으며 이는 마치 흑백영화 시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찰리 채플린은 그의 영화 <황금광 시대>, <모던 타임즈>, <위대한 독재자> 등과 같은 영화에서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인간의 소외의 과정을 꾸준히 보여주었다. 그의 영화들에서 기계문명과 자본부의 사회의 도구로 전락한 인간의 모습은 순전히 하나의 부품의 역할로 등장한다. 그는 처절하게 이러한 역설의 미학을 통하여 물질만능주의와 기계화 시대에 '인간의 소외'. 즉 '인간성 상실'에 대한 모습을 나타낸다. 이는 엄연한 개인의 자율성 침해로 인식될 수 있으며, 크게 생각한다면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라는 이데올로기 내에서 벌어지는 엄연한 폭력이다. 개인의 자율적인 사고를 마비시킨 채 철저하게 사회적 부품으로 전락시키는 모습은 처참히기까지 하다.
이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등장하는 '빅브라더'의 모습과 아주 동일하다. '빅브라더'는 기술과 문명의 발달로 인해 철저하게 인간들을 감시하는 장치로 등장한다. 빅브라더의 감시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인간들의 개인의 자율성은 처참하게 파괴되고, 비판적인 사고 또한 마비시킨다.
이와 관련해서 서구의 많은 철학자들은 그 폭력성에 대해서 고발을 하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진정으로 인간이 비판적 사고를 해야만 하는 많은 사상들이 뿜어져 나왔다. J.P.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그러하고 M.푸코의 권력담론이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의 미스터 백 형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기술과 인간은 충분히 조화를 이룰 수 있으며 인간이 지배가 되는 것이 아닌 그 문명으로 인해 인간의 생활은 더욱 윤택해질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 더불어 기술을 대하는 인간의 긍정적인 모습 그에 대한 찬가를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이러한 생각이 가장 잘 나타난 작품으로 꼽히는 <찰리 채플린>은 기존의 찰리 채플린에게 하는 하나의 답변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백남준의 작품들 속에는 끊임없는 조화와 정체성의 해체 등이 실질적인 주제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그가 서울, 도쿄, 쾰른, 뉴욕을 오가는 코스모폴리탄으로 삶 자체가 자신이 갖고 있는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러한 정체성을 해체하고 그것에 조화를 이루어 또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진정한 융화였던 것이다. 또한 동서양의 격식없는 동등한 시선에서의 만남, 음악과 예술의 조화, 모든 지구는 하나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각기의 문화와 삶의 형태는 다르지만 인간의 본질적인 존엄성은 동등하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것은 우리나라 전통의 음식인 '비빔밥'과 매우 닮아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의 융화, 음양오행의 진리가 비빔밥 속에는 담겨져 있으니까. 비빔밥 속에는 우주의 진리를 담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중심에는 우리의 삶이 있으니까. peace.
ps. 아주 오랜만에 글을 쓰려하니, 처참하게 써지질 않는다. 다시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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