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수용 그리고 마지막 ‘자유의지’의 발현
이 소설을 채택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인간의 삶의 근본적인 문제로 여겨지는 ‘죽음’에 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산자는 죽음에 대해서 논할 자격이 없다. 그들은 죽음을 경험해보지 못하였으니까. 죽음에 대해서 논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은 자만의 특권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인해 죽음에 대해서 추측만을 할 뿐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당신’이라는 노년의 인물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과 그것을 맞이하는 준비과정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죽음을 예감한 ‘당신’이, 그것에 대항하거나 반항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차근차근 마지막 순간을 준비하는 모습은, 노년의 생기를 잃은 모습이 쓸쓸하게 다가오지만 그것은 오히려 차분하게 독자의 마음에 안착한다. 사뭇 경건하기까지 하다.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이라고 인칭을 고집한 작가는 이것이 단순히 ‘당신’의 문제가 아닌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개개인이 언젠가는 직면하게 되는 자연의 섭리이자 삶의 커다란 문제라는 것을 인지시키기 위해서 사용한 장치일 것이다.
소설의 제목인 ‘흔적’의 사전 상의 의미는 어떤 현상이나 실체가 없어졌거나 지나간 뒤에 남은 자국이나 자취이다. 작가는 왜 이러한 제목을 붙였을까?
소설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다. ‘당신’이 자신의 죽음을 덤덤하게 준비하는 부분과 과거 회상 부분으로. 즉, 하루 동안 자신의 죽음을 덤덤하게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이 나타날 뿐이다. 회상에서 ‘당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죽음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이러하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그리고 아내. 이 순서는 단순히 시간적인 순서이지만 모두들 ‘죽음’의 형태를 맞이한 인물들로서 ‘당신’의 기억 속에 버젓하게 내재되어있다. 이것은 일종의 흔적이다. ‘당신’의 기억 속에 내재되어 있는 그들만의 온전한 흔적들이다. 그리고 죽음을 수용하고 있는 ‘당신’의 행동은 이러한 기억 속에 내재되어있는 흔적들조차 하나 둘 씩 지우는 행위로 묘사된다.
당신은 라이터와 신문지 몇 장을 찾아 들고 나온다. 마당에 붙은 텃밭 가장자리에 쪼그려 앉아 사진첩을 한 장씩 뜯어내기 시작한다. 종이가 두꺼워 쉽게 불이 붙지 않더니, 신문지를 집어넣자 금세 불꽃이 일어난다. 당신은 애써 사진 속의 얼굴들을 외면한 채 실눈을 뜨고 불길을 주시한다. 산간지역에선 가장 무서운 게 불이다. 민가에서 함부로 쓰레기를 태우지 못하도록 불 감시 차량들이 가을부터 봄까지 수시로 순찰을 돈다. 크기도 연대도 다른 수많은 사진들 중 아버지가 세상에 남긴 단 두 장뿐인 사진도 섞여 있다. 어머니, 아내, 아들, 친지들 그리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도 차례차례 재로 변하고 있다. 불현 듯 그것들이 당신의 육신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아니, 당신의 전 생애가 눈앞에서 송두리째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있는 것만 같다.(136쪽)
이것이 과거 기억의 흔적들, 즉 뇌리 속에 내재되어 있는 흔적들을 지우는 행위라면, 이를 제외한 부분, 즉 아침부터 밤까지 ‘당신’이 살아낸 마지막 온전한 하루의 기록을 간단히 나열하면 이렇다. 그 하루 동안 ‘당신’이 한 일이라야 잠을 깨어 간단한 아침을 먹고, 집 안에 남은 짐을 치우고, 뜻밖에 남아 있던 사진들을 태우고, 동물병원에 가서 병든 개를 안락사시키고, 집 근처로 돌아와 죽은 개를 묻고, 역으로 가서 열차표를 사고, 칼국수를 사 먹고, 친구에게 편지를 쓴 다음, 부산으로 가기위해 열차에 오른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어떠한 장애물 없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지만, 그것의 진행 속도는 무언가 차분하고 느릿하며 차근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10년 동안 살던 집에 남아 있는 자신의 모든 흔적들을 지울 수 있는 일들이 아주 수월하게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실질적은 흔적을 지우는 행위로서 기억의 흔적들을 지우는 일의 연장선상이다.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죽음에 대해서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닌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죽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이 두려움은 ‘당신’도 이미 느끼고 있다.
마지막 순간이 임박했음을 당신은 또렷이 예감하고 있었다. 길 위에서, 아니면 방 안에서. 어차피 당신이 죽음과 조우하는 형식은 그 둘 중 하나일 터였다. 그러나 무심히 걷거나 불시에 길바닥에 쓰러져 개처럼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끔직한 악취와 함께 부패한 시신으로 뒤늦게 발견되는 것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당신 몫의 육신, 그것은 바로 당신 자신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육신을 추악하고 끔찍한 오물 덩어리로 만들어 비정한 타인들의 조롱과 구역질과 가래침을 뒤집어쓰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당신에겐 그 외의 선택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신은 철저히 혼자였다. 이제 당신을 두렵게 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떻게 죽어야 이 초라한 흔적을 지상에 남기지 않을 것인가.(148족)
그리하여 작가가 ‘당신’으로 하여금 꿈꾸게 한 것은 하나의 완벽한 소멸이다. 다음 생에서는 잠시 피었다가 사라지는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가 되고 싶다는 그의 마지막 말처럼, 그는 모든 흔적을 지운다. 조촐하게 지내던 거처와 주변을 정리하는 그의 모습은 죽음이 아니라 실종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죽었다는 흔적조차 없게 만드는, 그럼으로써 비로소 이 세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고 싶어 하는 그의 노력 애처롭게 마저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소멸을 넘어서 필자가 더욱 흥미롭게 여겼던 것은 죽음의 방법을 스스로 택한 ‘당신’의 모습이다.
바다로 가자, 라고 당신이 결심을 굳힌 것은 두 달 전이었다. …(중 략)… 아아아아아. 울음소리였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사람인지 짐승인지조차도 모호한 그 통곡 소리가 천지를 가득하게 채우며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꿈에서 깨어난 당신은 까닭 모를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밤새도록 당신은 어둠 속에 웅크려 앉아서 그 울음소리에 대해서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보니, 어쩌면 그것의 정체를 알 것도 같았다. 그랬다. 그 울음은 목숨을 가진 지상의 모든 것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그 순간 당신의 뇌리에 뉴스 속 노부부의 모습이 떠올랐다. 당신은 그들이 다시 떠오르지 않기를 바랐다. 바다 밑 깜깜한 심연으로 영원히 가라앉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그리고 새벽 동이 희미하게 터올 무렵, 당신은 그동안 고민해왔던 해답을 마침내 찾았다.(150쪽)
위의 구절에서 나타나듯 ‘당신’은 스스로 죽음의 방법에 대해서 선택하고 있다. 바다라는 장소를 선택한 것도, 그리고 그동안 고민해왔던 해답을 마침내 찾은 것도 죽음을 맞이하고 흔적을 지우려는 자 ‘당신’이 홀로 ‘자유의지’에 의거하여 정한 것이다. 이는 스스로가 소멸을 하려는 준비인 동시에 마지막까지 인간으로서의 자유의지를 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마지막까지 정력을 다하여 스스로가 죽음의 방법을 택하고 자신의 의지가 가는대로 선택하였다는 것은 곧 인간은 결국 흔적을 남기기 위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단말마의 비명과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즉 몹시 고통스러운 상태를 맞이하지만(죽음) 비명을 지르는 행위(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하다. 이 소설은 죽음을 맞이하는 ‘당신’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두 가지의 형태의 흔적에 대한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숙명론적으로 받아들여야하는 죽음이라는 거대한 자연의 섭리 앞에서는 자신의 기억과 일상에서의 모든 흔적들을 지운다. 오히려 자연으로 돌아감으로써 홀연히 인간은 자연의 일부가 되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죽음의 방법에 대해서는 인간이 스스로 택하게 된다. 이는 일종의 인간이 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자신이 추구하고자하는 것에 대해서 비록 그것이 죽음 앞일지라도 그 방법에 대해서는 택할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세상에 어떠한 모습과 형태로서라도 자신의 존재를 조금이나마 알리고자 하는 즉,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연의 욕망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죽음이 ‘무(無)’라면 인간의지의 발현은 ‘유(有)’라 할 수 있다. 결국은 이것은 반대에 있는 것이 아닌 하나의 선상에 있는 것이다. 대자연의 섭리에 적응하며 사는 것이 인간이며, 그러한 인간을 다시 받아주는 곳은 대자연 밖에 없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 두 상황을 공통적으로 맞이할 수 있는 것은 ‘흔적’이라는 두 음절의 단어라는 것과 인간은 늙고 병들고 마련이기 때문에 죽음은 때때로 구원일 수도 있는 것, 즉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닐까.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