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9-16

『페북허세8』

별다른 생각을 하지않고 있는데 눈 앞에 이슬이 맺힌다. 그리고 한줄기로 '쭉'하니 흘러내린다. 문득 메리 파이퍼의 '노인'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 생각난다. '흔적없이 살아가다가 흔적없이 살아가리라' 제범 이제는 밤기운이 쌀쌀하다. 무더위는 흔적을 없앤지 오래이다. 가을 기운에 모두가 취해있을 때, 여름도 흔적을 남기지 못한 서러움에 눈물을 흘리고, 우리도 똑같은 서러움에 눈물을 흘리겠지. 마치 먼지가 된 것처럼.



                                                                      - 박정우,『페북허세8』




노인 
             

나는 감정의 서민
웬만한 감정은 내게 사치다
연애는 가장 호사스런 사치
처량함과 외로움, 두려움과 적개심은 싸구려이니
실컷 취할 수 있다

나는 행위의 서민
뛰는 것, 춤추는 것, 쌈박질도 않는다
섹스도 않는다

나는 잠의 서민
나는 모든 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린다
변기 물 내리는 소리
화장수 병 뚜껑 닫는 소리
슬리퍼 끄는 소리
잠에 겨운 소근거림
소리가 그친 뒤 보청기를 빼면
까치가 깍깍 우짖는다

나는 기억의 서민
나는 욕망의 서민
나는 生의 서민

나는 이미 흔적일 뿐
내가 나의 흔적인데
나는 흔적의 서민
흔적 없이 살아가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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