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7-08

whisper

장마가 오기 직전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한 여름의 무더움을 벗어나 잠쉬 쉬라는 듯이. 그 바람은 간드러지게 다가오며 나에게 속삭이며 말하는 기분이다.

어느덧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너의 잠자는 숨소리가 이제는 나를 포근하게 감싸주는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이불이 되었구나. 코고는 소리마저도 달달하게 느껴진다. 고맙다. 진실로.

어디로 떠나고 싶냐는 나의 질문에 너는 추운 시베리아로 가고싶다 했다. 그 추운 시베리아를 너는 그토록 왜 그리워하는 걸까. 마음의 무게를 이제 조금은 덜어놔. 추운 곳보다는 따스한게 좋잖아. love & peace.


영화 <이터널 선샤인>


 

2015-04-15

임철우 단편소설 「흔적」에 대한 작품해설 및 감상

‘죽음’에 대한 수용 그리고 마지막 ‘자유의지’의 발현
 
이 소설을 채택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인간의 삶의 근본적인 문제로 여겨지는 ‘죽음’에 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산자는 죽음에 대해서 논할 자격이 없다. 그들은 죽음을 경험해보지 못하였으니까. 죽음에 대해서 논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은 자만의 특권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인해 죽음에 대해서 추측만을 할 뿐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당신’이라는 노년의 인물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과 그것을 맞이하는 준비과정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죽음을 예감한 ‘당신’이, 그것에 대항하거나 반항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차근차근 마지막 순간을 준비하는 모습은, 노년의 생기를 잃은 모습이 쓸쓸하게 다가오지만 그것은 오히려 차분하게 독자의 마음에 안착한다. 사뭇 경건하기까지 하다.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이라고 인칭을 고집한 작가는 이것이 단순히 ‘당신’의 문제가 아닌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개개인이 언젠가는 직면하게 되는 자연의 섭리이자 삶의 커다란 문제라는 것을 인지시키기 위해서 사용한 장치일 것이다.
소설의 제목인 ‘흔적’의 사전 상의 의미는 어떤 현상이나 실체가 없어졌거나 지나간 뒤에 남은 자국이나 자취이다. 작가는 왜 이러한 제목을 붙였을까?
소설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다. ‘당신’이 자신의 죽음을 덤덤하게 준비하는 부분과 과거 회상 부분으로. 즉, 하루 동안 자신의 죽음을 덤덤하게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이 나타날 뿐이다. 회상에서 ‘당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죽음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이러하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그리고 아내. 이 순서는 단순히 시간적인 순서이지만 모두들 ‘죽음’의 형태를 맞이한 인물들로서 ‘당신’의 기억 속에 버젓하게 내재되어있다. 이것은 일종의 흔적이다. ‘당신’의 기억 속에 내재되어 있는 그들만의 온전한 흔적들이다. 그리고 죽음을 수용하고 있는 ‘당신’의 행동은 이러한 기억 속에 내재되어있는 흔적들조차 하나 둘 씩 지우는 행위로 묘사된다.
 
당신은 라이터와 신문지 몇 장을 찾아 들고 나온다. 마당에 붙은 텃밭 가장자리에 쪼그려 앉아 사진첩을 한 장씩 뜯어내기 시작한다. 종이가 두꺼워 쉽게 불이 붙지 않더니, 신문지를 집어넣자 금세 불꽃이 일어난다. 당신은 애써 사진 속의 얼굴들을 외면한 채 실눈을 뜨고 불길을 주시한다. 산간지역에선 가장 무서운 게 불이다. 민가에서 함부로 쓰레기를 태우지 못하도록 불 감시 차량들이 가을부터 봄까지 수시로 순찰을 돈다. 크기도 연대도 다른 수많은 사진들 중 아버지가 세상에 남긴 단 두 장뿐인 사진도 섞여 있다. 어머니, 아내, 아들, 친지들 그리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도 차례차례 재로 변하고 있다. 불현 듯 그것들이 당신의 육신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아니, 당신의 전 생애가 눈앞에서 송두리째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있는 것만 같다.(136쪽)
 
이것이 과거 기억의 흔적들, 즉 뇌리 속에 내재되어 있는 흔적들을 지우는 행위라면, 이를 제외한 부분, 즉 아침부터 밤까지 ‘당신’이 살아낸 마지막 온전한 하루의 기록을 간단히 나열하면 이렇다. 그 하루 동안 ‘당신’이 한 일이라야 잠을 깨어 간단한 아침을 먹고, 집 안에 남은 짐을 치우고, 뜻밖에 남아 있던 사진들을 태우고, 동물병원에 가서 병든 개를 안락사시키고, 집 근처로 돌아와 죽은 개를 묻고, 역으로 가서 열차표를 사고, 칼국수를 사 먹고, 친구에게 편지를 쓴 다음, 부산으로 가기위해 열차에 오른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어떠한 장애물 없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지만, 그것의 진행 속도는 무언가 차분하고 느릿하며 차근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10년 동안 살던 집에 남아 있는 자신의 모든 흔적들을 지울 수 있는 일들이 아주 수월하게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실질적은 흔적을 지우는 행위로서 기억의 흔적들을 지우는 일의 연장선상이다.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죽음에 대해서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닌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죽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이 두려움은 ‘당신’도 이미 느끼고 있다.
 
마지막 순간이 임박했음을 당신은 또렷이 예감하고 있었다. 길 위에서, 아니면 방 안에서. 어차피 당신이 죽음과 조우하는 형식은 그 둘 중 하나일 터였다. 그러나 무심히 걷거나 불시에 길바닥에 쓰러져 개처럼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끔직한 악취와 함께 부패한 시신으로 뒤늦게 발견되는 것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당신 몫의 육신, 그것은 바로 당신 자신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육신을 추악하고 끔찍한 오물 덩어리로 만들어 비정한 타인들의 조롱과 구역질과 가래침을 뒤집어쓰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당신에겐 그 외의 선택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신은 철저히 혼자였다. 이제 당신을 두렵게 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떻게 죽어야 이 초라한 흔적을 지상에 남기지 않을 것인가.(148족)
 
그리하여 작가가 ‘당신’으로 하여금 꿈꾸게 한 것은 하나의 완벽한 소멸이다. 다음 생에서는 잠시 피었다가 사라지는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가 되고 싶다는 그의 마지막 말처럼, 그는 모든 흔적을 지운다. 조촐하게 지내던 거처와 주변을 정리하는 그의 모습은 죽음이 아니라 실종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죽었다는 흔적조차 없게 만드는, 그럼으로써 비로소 이 세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고 싶어 하는 그의 노력 애처롭게 마저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소멸을 넘어서 필자가 더욱 흥미롭게 여겼던 것은 죽음의 방법을 스스로 택한 ‘당신’의 모습이다.
 
바다로 가자, 라고 당신이 결심을 굳힌 것은 두 달 전이었다. …(중 략)… 아아아아아. 울음소리였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사람인지 짐승인지조차도 모호한 그 통곡 소리가 천지를 가득하게 채우며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꿈에서 깨어난 당신은 까닭 모를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밤새도록 당신은 어둠 속에 웅크려 앉아서 그 울음소리에 대해서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보니, 어쩌면 그것의 정체를 알 것도 같았다. 그랬다. 그 울음은 목숨을 가진 지상의 모든 것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그 순간 당신의 뇌리에 뉴스 속 노부부의 모습이 떠올랐다. 당신은 그들이 다시 떠오르지 않기를 바랐다. 바다 밑 깜깜한 심연으로 영원히 가라앉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그리고 새벽 동이 희미하게 터올 무렵, 당신은 그동안 고민해왔던 해답을 마침내 찾았다.(150쪽)
 
위의 구절에서 나타나듯 ‘당신’은 스스로 죽음의 방법에 대해서 선택하고 있다. 바다라는 장소를 선택한 것도, 그리고 그동안 고민해왔던 해답을 마침내 찾은 것도 죽음을 맞이하고 흔적을 지우려는 자 ‘당신’이 홀로 ‘자유의지’에 의거하여 정한 것이다. 이는 스스로가 소멸을 하려는 준비인 동시에 마지막까지 인간으로서의 자유의지를 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마지막까지 정력을 다하여 스스로가 죽음의 방법을 택하고 자신의 의지가 가는대로 선택하였다는 것은 곧 인간은 결국 흔적을 남기기 위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단말마의 비명과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즉 몹시 고통스러운 상태를 맞이하지만(죽음) 비명을 지르는 행위(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하다. 이 소설은 죽음을 맞이하는 ‘당신’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두 가지의 형태의 흔적에 대한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숙명론적으로 받아들여야하는 죽음이라는 거대한 자연의 섭리 앞에서는 자신의 기억과 일상에서의 모든 흔적들을 지운다. 오히려 자연으로 돌아감으로써 홀연히 인간은 자연의 일부가 되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죽음의 방법에 대해서는 인간이 스스로 택하게 된다. 이는 일종의 인간이 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자신이 추구하고자하는 것에 대해서 비록 그것이 죽음 앞일지라도 그 방법에 대해서는 택할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세상에 어떠한 모습과 형태로서라도 자신의 존재를 조금이나마 알리고자 하는 즉,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연의 욕망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죽음이 ‘무(無)’라면 인간의지의 발현은 ‘유(有)’라 할 수 있다. 결국은 이것은 반대에 있는 것이 아닌 하나의 선상에 있는 것이다. 대자연의 섭리에 적응하며 사는 것이 인간이며, 그러한 인간을 다시 받아주는 곳은 대자연 밖에 없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 두 상황을 공통적으로 맞이할 수 있는 것은 ‘흔적’이라는 두 음절의 단어라는 것과 인간은 늙고 병들고 마련이기 때문에 죽음은 때때로 구원일 수도 있는 것, 즉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닐까.



 
 
 
 
 
 
 
 
 
 
 
 
 
 
 
 
 
 
 
 
 
 
 
 
 
 

2015-02-07

타인의 자유를 억업하는 자, 과연 그들의 자유로운 행위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

  중동의 요르단이 자국의 파일럿을 IS에 의해서 잃었다. 영예로운 파일럿을 잃은 그 보복으로 현재 IS를 전멸하고자 공습을 시작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르단이 IS를 향해 공습을 전개했다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다. 본질적으로 생각해보아야할 것은 과연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자, 과연 그들의 자유로운 행위도 정당화될 수 있는 가?'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사회는 존재하고, 사회가 존재하는 한 대화는 필수적이다.'라는 유명한 문구가 있다. 이는 칼 포퍼라는 철학자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저서에 적은 마지막 문구이다. 그렇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인간이며, 따라서 사회는 존재하고, 결국은 대화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IS의 무자비한 행동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 논리대로라면 대화가 통하지 않고, 따러서 그들에게는 사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만이 존재하는 것이며, 결국은 인간이 아니다. 그렇다. 그들은 동물이다.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며 무자비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정당화시키는 행위야말로 반인륜적이며 도저히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행위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들의 폭력성 또한 정당화 될 수 있는가? 절대적으로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이미 그들은 타인의 자유를 앗아갔다. 이것이 바로 폭력이다. 폭력의 형태는 눈에 보이는 직접적 폭력과 눈에 보이지 않는 간접적 폭력으로 구분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참수영상을 본다면 지극히 물리적 폭력을 가한다. 이것은 가장 악랄한 방법이며 그 폭력의 행위는 절대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다. 이미 타인의 자유를 앗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의 폭력이고 폭력은 어떠한 형태가 되었던 정당화 될 수 없으며, 그 형태가 물리적인 형태로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는 것이라면 더욱더 비극적이다.

  지금 현재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정말 최악이다. 진실로 최악 중 최악이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반인륜적 행위가 이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다. 끔찍한 현실이다. 휴머니즘은 그들에게 이미 저속한 서양의 사상으로 낙인된 것인가? 휴머니즘을 학문적으로 구체화한 서구의 사상도 실소를 자아내지만, 그 실소를 넘어서 인간에게 절망감을 안겨주는 행위가 바로 현재의 IS인 것이다.

ps. 그냥 주저리주저리, 손가는대로 생각이 가는대로 적었다. 참. 말이 안나온다.





2014-11-22

언젠가 다시 한번 - 최승자



* 언젠가 다시 한번 - 최승자

언젠가 다시 한번
너를 만나러 가마.
언젠가 다시 한번
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우리가 지나쳐온,
아직도 어느 갈피에선가
흔들리고 있을 아득한 그 거리들.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그러나 나는 다만 들이키고 들이키는
흉내를 내었을 뿐이다.
그 치욕의 잔
끝없는 나날
죽음 앞에서
한 발 앞으로
한 발 뒤로
끝없는 그 삶의 무도를
다만 흉내내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너를 피해
달아나고 달아나는
흉내를 내고 있다.
어디에도 없는 너를 피해

언젠가 다시 한번
너를 만나러 가마
언젠가 다시 한번
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이 세계의
어느 낯선 모퉁이에서
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 스스로의 마음을 이제껏 양육시켰던 오늘날, 형형색색의 낙엽은 정처없이 날려가는구나.  바스락거리는 낙엽처럼 이미 마음의 자양분이 없어진듯하다. 매몰차게 다가올 겨울바람은 나의 자양분을 더욱 앗아갈 것이며, 아직 이르기는 하지만 따스한 봄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난, 한없이 어리고 어린 홀로 선 존재가 되었다. 


- 그냥 이 시를 읽고 싶었고, 이러한 글을 쓰고 싶었3. 





너의 모습을 처음 봤을때 
사랑이라고 느끼고 싶었지 
하지만 너는 내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아 
난 화가 났었지

지금까지 이런 기분은 
처음인것만 같아 
어느 곳 어느 자리에 시선을 모아도
보이는건 너의 모습뿐 
다른건 관심 없어 
하지만 나의 마음을 네게 보이긴 정말 싫어 

너와 함께 할수 있다면 
그 어떤 슬픔조차 
나는 감당할수 있을것 같은데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엔 
넌 내게 너무나도 멀리 있는것 같아

그 어떤 사랑도 난 원치 않았지 
이별을 견뎌낼 자신이 없기에 
하지만 이렇게 니가 내 마음을
장악할지는 예상도 못했지

지금까지 이런 기분은 
처음인것만 같아 
어느 곳 어느 자리에 시선을 모아도
보이는건 너의 모습뿐 
다른건 관심 없어 
하지만 나의 마음을 네게 보이긴 정말 싫어 

너와 함께 할수 있다면 
그 어떤 슬픔조차 
나는 감당할수 있을것 같은데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엔 
넌 내게 너무나도 멀리 있는것 같아

너와 함께 할수 있다면 
그 어떤 슬픔조차 
나는 감당할수 있을것 같은데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엔 
넌 내게 너무나도 멀리 있는것 같아

2014-10-03

형님의 신보 소식.




프린스 형님의 신보가 나왔다.
그의 백밴드 3rd eyed girl과 함께. 앨범커버가 무엇보다 초현실주의 느낌이라 더 매력적.
06년에 앨범 내신 이후에 꽤나 간지곡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있다! 와우!

Art Official Age track list:
1. "Art Official Cage"
2. "Clouds"
3. "Breakdown"
4. "The Gold Standard"
5. "U Know"
6. "Breakfast Can Wait"
7. "This Could Be Us"
8. "What It Feels Like"
9. "Affirmation I & II"
10. "Way Back Home"
11. "Funknroll"
12. "Time"
13. "Affirmation III"
Plectrumelectrum track list:
1. "Wow"
2. "Pretzelbodylogic"
3. "Aintturninround"
4. "Plectrumelectrum"
5. "Whitecaps"
6. "Fixurlifeup"
7. "Boytrouble"
8. "Stopthistrain"
9. "Anotherlove"
10. "Tictactoe"
11. "Marz"
12. "Funknroll"


2014-09-01

스스로의 부족한 깨달음.

 작년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다시 찾지 않을 줄 알았던 성당에 스스로 발길을 돌렸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것은 아무도 모르겠지만. 문득 가고나서 보니 어린이 미사. 굳.
어린이 미사에 참여한건 내가 10살때. 사실 그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기억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닥 독실한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인간의 본성상 의지할 것은 신뿐이더라. 나의 족적을 끊은지 16년만에 찾았던 그 어린이 미사는 각종 깨달음을 나에게 전해준 터. 최악의 2014년 여름을 맞이하고 겪어왔던 나에게는 하나의 각성제가 되었을까. 어린이들의 목소리들이. 그곳에 울려퍼지는 사운드조차 16년째 동일하여 저절로 뱉어진 나의 순수함이였을까. 변한 것은 나의 키 뿐. 뭐 쁠러스하자면 빠진 젖살 정도?
꽤나 흥미로웠다. 단 한시간이지만 말이다. 이런 적은 없었다. 한 계절을 되돌아 본다는 것이. 그래도 그게 뭐가 되었건 스스로 특별했던 여름이였으니까. 하하.


1. 어른들은 유년시절에 대해서 스스로 기억하고 있지만 이미 어른이 된 이상 그들의 잣대로 어린이들을 구속한다. 마치 자신의 유년시절은 원래 없던 것처럼 말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어 본 사람은 느낄 것이다. 이 세상에 어린이가 '짱'이라는 것을. 여전히 시대가 지나가고 세월이 지나감에도 누군가에 대한 구속력은 현존한다. 더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없게 말이다. 희망의 빛이여. 시발.

2. 누군가 '영원'하자고 약속하는 것, 혹은 관계를 '운명'이라고 규정짓는 것을 보면 그것은 허황된 것이다. '영원'과 '운명'은 신이 그 권리를 갖고 있으며 그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자는 신의 선택만을 받은 자일 뿐이다. 인간의 잣대로 '운명'과 '영원'을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권리를 부여받고자 발버둥 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의지로 그 열망을 표출하고자 꽤나 멋지고 매혹적인 단어를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영원'과 '운명'은 이 세상에 없다. 그것은 단지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질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노력'은 단순히 열심히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말그대로 '힘쓸 노'의 '힘 력'의 의미이다.  인간이 갖고있는 '힘'의 표출인 것이다. 힘을 표출했는가? 적절하게 신의 권리를 부여받기 위해 발버둥 친 것에 불과하다.  아직도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것이 신의 영역이며, 그 어느누구도 어떠한 정도가 신의 권리를 부여받을 수 있는 지에 대해서 모른다. 이 세상의 누구도 '영원'과 '운명'을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에. 또한 '신'이라는 단어 또한 그에 버금가는 멋진 단어이다. 시발.

3. 모든 슬픔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적절한 역치값이 필요하다. 그것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며 그 역치값이 상당히 낮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좌절하고 절망한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경험력의 부족이며, 일례로 '이별'이라는 두 단어에 힘들어하는가? 결론적으로 그것은 '이별'을 경험한 자의 부질없는 찌질함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아름다운 미사여구정도로는 괜찮겠다. 그 누구보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감정의 노예가 된 것, 그 기간의 정도는 개인의 경험의 차이지만, 이러한 것조차 스스로의 역치값을 높여가는 일환이다. 자기합리화가 꽤나 멋진 단어라고 방금 든 생각이다. 시발.

4. 옛 연인에서 다시금 친구로, 꽤나 섹시한 관계라고 이야기한다. 연인보다 더욱더 섹시한 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감정적으로는 스스로의 부족함과 기껏 좆도 아닌 이기심이 그 길을 막는 것 같지만, 더욱더 생산적이고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허황된 자신감속에서 실질적인 관계를 유지해보기로 결론지었다. 연인에 있어서는 감정을 같이 공유한 관계이지만, 그 관계를 벗어나 오히려 '노력'의 일환으로 진솔한 대화를 더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 누구보다 강력하게 맺어진 '추억'의 끈을 놓치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세상(?)이 만든 암울한 장벽을 향해 함께 망치질 할 수 있는 진정한 관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섹시한 관계를 맺어본 적이 전연 있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한 번즈음은 필요하다고 느낀다. 단 한 번만. 정확히 딱 한 번만. 말이다.
  일찍이 프랑스의 철학자 조르주 바티유는 에로티시즘을 일러, '불연속적인 인간의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의 한 형태'라고 말했으니까. 탯줄로 연결되어 있던 모태로부터 분리되어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인간의 삶이란 불연속성을 경험해 가는 도저한 연속의 과정이며, 모태로부터의 이탈이라는 불연속적인 경험을 통해 불가해한 세계 속에 발을 디딘 인간은, 그물처럼 촘촘히 얽혀있는 관계성을 통해 개체와 개체사이의 불연속성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니까. 그 종말에는 불연속적인 그리고 일회성만의 죽음이 남는 거니까.
   괜찮은 섹시한 관계이며 에로티시즘의 발현이라고 해도 괜찮겠다. 시발.




한 시간동안 머릿 속에 정리한 것 끝. 오늘도 무사히. 무진장 글을 읽고 혹은 글을 쓰고 싶었던 새벽.








2014-08-13

소원

달이
그 어느때보다.
물보다도 더 맑게 빛났고, 불보다도 더 환하게 빛났다.
비온 뒤 청명한 하늘
스산한 공기가 몸을 감쌌다. 여름이 잊혀진지는 오래인듯.
달을 바라보며, 유일하게, 순수하고, 정갈한 마음으로 그리고 간절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소원을 비는 것 뿐이다.

그렇다. 소원을 비는 것 뿐이다. 

'언젠가는 정말 언젠가는......'

꽤나 아름다운 밤이다. 적어도 오늘은 소원을 빌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