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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3

형님의 신보 소식.




프린스 형님의 신보가 나왔다.
그의 백밴드 3rd eyed girl과 함께. 앨범커버가 무엇보다 초현실주의 느낌이라 더 매력적.
06년에 앨범 내신 이후에 꽤나 간지곡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있다! 와우!

Art Official Age track list:
1. "Art Official Cage"
2. "Clouds"
3. "Breakdown"
4. "The Gold Standard"
5. "U Know"
6. "Breakfast Can Wait"
7. "This Could Be Us"
8. "What It Feels Like"
9. "Affirmation I & II"
10. "Way Back Home"
11. "Funknroll"
12. "Time"
13. "Affirmation III"
Plectrumelectrum track list:
1. "Wow"
2. "Pretzelbodylogic"
3. "Aintturninround"
4. "Plectrumelectrum"
5. "Whitecaps"
6. "Fixurlifeup"
7. "Boytrouble"
8. "Stopthistrain"
9. "Anotherlove"
10. "Tictactoe"
11. "Marz"
12. "Funknroll"


2013-08-11

8월 11일

1969년_다이애나 로스, 잭스 5를 소개한다


잭슨 5
「Diana Ross Presents The Jackson 5」

 1969년 8월 11일, 다이애나 로스는 LA의 베버리 힐스에 있는 한 클럽에 손님들을 초대했다. 가수가 사람을 모았으니 공연이 펼쳐진 것은 당연. 하지만 이날 다이애나 로스가 사람을 모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다이애나 로스는 자신의 공연을 펼치기에 앞서 오프닝 무대에 한 신인 그룹을 소개했다. 앞으로 모타운을 대표할 그룹이 될 것이라고 소개된 이그룹의 이름이 바로 잭슨 5(Jackson 5)였다.
  그해 12월, 잭슨 5의 데뷔 앨범이 발매되었다. 앨범의 제목은 「Diana Ross Presents The Jackson 5」.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잭슨 5의 데뷔는 다이애나 로스의 적극적인 후원 속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다이애나 로스의 판든은 옳았다. 잭슨 5는 데뷔와 동시에 <I want you back>, <ABC>, <I found that girl>, <I'll be there>, <Who's loving you>등의 히트곡들을 잇달아 터뜨리며 모타운을 대표하는 인기 그룹으로 성장해갔던 것이다. 
  잭슨가의 다섯 형제로 이루어진 형제 그룹 잭슨 5의 막내가 바로 1980년대 팝의 황제가 될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이었다.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잭슨 5

마이클 잭슨



저 사진 속의 가운데 아이가 바로 훗날의 마이클 잭슨이다. 마이클 잭슨이 저 당당하게 서있는 모습을 봐라. 좌중을 압도하는 것은 물론 저 뒤에 시대를 풍미했던 수많은 가수들 앞에 위세등등하게 서있다. 그렇다. 저렇게 당당해야한다. 무엇이든 당당해야한다. 마치 이것은 정정당당 Korea라할까. 마이클 잭슨의 노래와 잭슨 5의 수많은 노래들을 여러분은 익히 들어왔을터. 오늘은 다이애나 로스의 노래를 한곡 들어봅시다! 어제와 오늘 모타운(Motown)에 대해서 계속해서 등장하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모타운은 최초의 아프리카 미국인이 세운 레이블로써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즉 흑인 예술가들을 위한 음악의 대표 레이블이다. 미국의 흑인 음악은 모타운이 키운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런 모타운이 위기에 처했었으니!

2013-08-10

8월 10일

1963년_레코드 브레이커스, 리틀 스티비 원더


스티비 원더
「The Definitive Collection」

 1963년 8월 10일자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오른 곡은 리틀 스티비 원더(Little Stevie Wonder)의 <Fingertips Part 2>였다. 후에 리틀을 떼고 그의 이름 다섯자를 팝 음악사에 찬연하게 아로새기게 되는 흑인 음악의 거장 스티비 원더의 첫 번째 빌보드 넘버원 곡이었다. 놀라운 것은 당시 시티비 원더의 나이 불과 열세 살에 불과했다는 사실(그는 1950년 5월 13일생)이다. 40년이 넘도록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는 최연소 빌보드 정상 등극의 신기록이다.
  한편 <Fingertips Part 2>가 수록된 앨범 「The 12 Years Old Genius」도 당당히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올랐는데 이 앨범 또한 각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바로 모타운이 배출한 최초의 빌보드 넘버원 앨범이라는 사실. <Fingertips Part 2>는 한 가지 기록을 더 가지고 있는 데 그것은 이 곡이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른 최초의 라이브 싱글이었다는 사실이다.
  기록은 깨지라고 있는 것이라는 말도 있듯이 스티비 원더가 기록한최연소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 정복의 기록은 그로부터 7년 후인 1970년에 깨졌다. 잭슨 파이브의 첫 번째 넘버원 싱글인 <I want you back>이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르던 1970년 1월 31일, 잭슨 파이브의 막내 마이클 잭슨의 나이 겨우 열한 살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그룹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내건 솔로로서만 본다면 스티비 원더의 신기록은 아직 유효하다. 1972년 10월 14일 역시 마이클 잭슨이 솔로로서는 첫 번째 넘버원 곡인 <Ben>을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올려놓던 날, 이미 세월은 흘러 마이클 잭슨의 나이도 어느덧 열네 살이었다.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젋은 시절 스티비 원더

오늘날의 스티비 원더




이 형님의 위대함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세계의 사람들이 알터. 맹인이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만큼은 인류최강급. 게다가 음악도 미쳤다. 우리가 살면서 무조건적으로다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확률이 100%. 그만큼 알겠지? 뭐 말이 필요없어. 진짜. 대! 박!

2013-08-09

8월 9일

1984년_아이언 메이든, 냉전의 벽을 뛰어넘다.



아이언 메이든
「Live After Death」
  1984년 8월 9일, 록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가장 넓은 지역을 아우르며 펼쳐진 공연으로 기록되고 있는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의 역사적인 World Slavery Tour의 막이 올랐다.
  1984년 8월 9일 시작되어 이듬해 7월 5일까지 거의 1년 가까이 진행된 이 역사적인 투어는 미국, 영국은 물론 독일, 캐나다, 프랑스, 스웨덴,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에서 일본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펼쳐졌는데 특히 이 투어가 각별하게 평가받는 이유는 위에서 말한 지역 외에도 폴란드와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등 동구권 국가들에서도 공연이 이루어짐으로써 서방의 헤비메탈 밴드가 동구권 국가에서 공연한 최초의 사례가 되었기 때문이다(록 밴드로는 1967년 롤링 스톤즈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공연한 적이 있었다).
  주다스 프리스트와 함께 NWOBHM(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의 쌍두마차로 군림했던 아이언 메이든은 이들의 대표작인 「The Number Of The Beast」등의 명반과 함께 1980년대 헤비메탈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정상의 밴드이기도 하지만 또한 냉전의 시대였던 당시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동구권 투어의 신호탄을 올림으로써 음악을 통한 이념장벽 붕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던 주인공으로도 기억됨이 마땅하다.
  그 역사적인 World Slavery Tour가 1984년 8월 9일, 폴란드에서 막이 올랐다. 1985년 발매된 라이브의 명반 「Live After Death」는 바로 그 World Slavery Tour의 하이라이트를 담은 앨범이다.


아이언 메이든



1995년_최후의 얼터너티브 밴드가 사라졌다


그레이트풀 데드
「American Beauty
  그레이트풀 데드(Greatful Dead)는 너무나 미국적인 밴드였다. 그렇기에 그들이 미국에서 가지는 영향력이나 미국에서 받았던 사랑에 비해 국내에서는 홀대받는 대표적인 그룹이다. 1960년대 후반의 히피즘과 샌프란시스코 사이키델릭 록 씬의 선봉에 있었던 그레이트풀 데드는 이후에도 시대를 초월해 미국인들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밴드였다. 포크와 컨트리, 블루스가 적절히 조합된 이들의 음악은 가장 미국적인 음악으로 평가받았으며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미국의 영웅이었다.
  그레이트풀 데드를 이끌었던 록의 거장 제리 가르시아(Jerry Garcia)가 1995년 8월 9일, 5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리고 그의 사망과 함께 그레이트풀 데드는 사실상 자연 소멸됐다. 제리 가르시아가 사망하자 미국 언론은 제도권 사회에 저항하는 마지막 밴드가 소멸했다고 애석해 했으며 특히 '뉴스위크'지는 '최후의 얼터너티브 밴드가 사라졌다'고 논평했다.
그레이트풀 데드
제리 가르시아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1. 우선 아이언 메이든에 대해서는 지난 8월 7일 브루스 디킨슨관련 글에서 조금은 언급한적이있다. 저 영상은 글에서 나와있는 것처럼 World Slavery Tour의 일부이며 그들은 노래곡처럼 Ace High였다. 역시 음악은 이념을 뛰어넘는 위대한 힘을 지닌 것이다. 그들에게 열광하는 저 동구권 사람들의 모습을 보라. 그들은 구 소련의 억압과 구속을 아이언 메이든의 노래를 듣고 해방감으로 승화시킨 것임이 분명하다.

2. 그레이트풀 데드는 사실 나도 잘 알지 못하는 밴드이다. 그러나 그들의 음악에는 적나라한 포크와 컨트리 그리고 미국인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정서가 들어가있는 것 같다. 마치 우리음악에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미국인들 또한 그들의 노래를 듣고 가장 미국적인 밴드를 잃었다는 것을 개탄한 것은 크게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2013-08-08

8월 8일

1960년_운율이 척척 맞는 
<Itsy bitsy~>빌보드 넘버원


  시에 운율이 있듯이 노래의 가사에도 대구의 글자 숫자나 어미 처리에 있어서 일정한 규칙이 있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힙합에서 말하는 라임이라는 것도 일종의 운율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올드 팝 중에서 운율이 가장 뛰어난 곡을 꼽는다면 제목부터 구절이 척척 들어맞는 브라이언 하일랜드(Brian Hyland)의 <Itsy bitsy  teenie weenie yellow polka dot vikini>가 아닐까 싶다. 브라이언 하일랜드의 <Itsy bitsy teenie weenie yellow polka dot vikini>가 1960년 8월 8일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올랐다.
  혹시 제목이 너무 길어서 외울 수가 없다고 불만이라면 두 단어씩 끊어서 읽고 그렇게 외워보라. 그러면 쉽다. <Itsy bitsy / teenie weenie / yellow polka / dot vikini>.
  이밖에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브라이언 하일랜드의 노래라면 아마도 <Sealed with a kiss>가 아닐런지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어디선가인가 배철수 형님이 브라이언 하일랜드의 <Sealed with a kiss>를 듣고나서 그 이후로 팝에 황홀경이 되었다는 글을 본적이 있는 것 같다. 나는 그의 노래는 잘 모르지만, <Sealed with a kiss>는 예전에 '장수퀴즈'에서 엔딩곡으로 나왔던 어린시절 새파란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8월 8일은 내 사랑하는 동생 영우의 생일이기도 하다. 그에게 이 노래를 띠운다. 사랑한다. 영우야♥



2013-08-07

8월 7일

1958년_아이언 메이든의 개성파, 
보컬리스트 브루스 디킨스 출생

브루스 디킨슨
「The Best Of Bruce Dickinson」

  1980년대 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을 주도했던 그룹은 주다스 프리스트, 데프 레파드 그리고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이었다. 그중에서도 선봉이라면 어렵긴 하지만 아이언 메이든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앨범 재킷마다 등장하던 '에디'라는 독특한 캐릭터와 함께 헤비메탈 씬을 강타했던 아이언 메이든 ㅈㄴ력의 절반은 단연 보컬리스트 브루스 디킨스(Bruce Dickinson)이었다. 브루스 디킨슨은 1958년 8월 7일, 영국 북부의 광산촌 워크숍에서 태어났다.
  샘슨(Samson)의 보컬리스트로 활야갛던 브루스 디킨슨이 아이언 메이든호에 승선한 것은 1981년이었다. 그의 가입과 동시에 아이언 메이든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아이언 메이든의 대표 앨범 「The Number Of The Beast」, 「Killers」, 「Powerslave」등이 모두 브루스 디킨슨 재적 시절에 터져나온 것들이었다. 브루스 디킨슨의 광폭한(?) 보컬은 아이언 메이든의 상징이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솔로 활동을 병행했던 그가 1994년 밴드를 공식 탈퇴하지 아이언 메이든이 순식간에 침체기로 접어든 것은 밴드 내에서 브루스 디킨슨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 하지만 브루스 디킨슨 없는 아이언 메이든이 있을 수 없었듯 아이언 메이든을 떠난 브루스 디킨슨 역시 힘을 잃긴 마찬가지였다. 솔로로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한 브루스 디킨슨은 1999년 다시 아이언 메이든으로 돌아왔고, 아이언 메이든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브루스 디킨슨은 17살 때까지 학교 대표 펜싱 선수로 활약했을 만큼 스포츠에도 소질을 보였고 소설을 써낼 만큼 글재주도 뛰어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브루스 디킨슨

마이클 잭슨



형님 두분은 모두 58년 개띠. 왜 58년 개띠는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가. 영원히 의문으로 남겨진 미제이다. 동갑내기이지만 한명은 세상을 달리했고 한명은 여전히 당당하게 노래를 하고 있다. 인생무상. 뭐 있는가. 브루스 디킨슨을 보면 글도 잘써, 운동도 잘해, 노래 잘해. 만능엔터테이너이다. 마치 소설가 이제하를 보는 듯하다. 글잘써, 노래 잘해, 시나리오도 써. 참 사람이란. 예술가란. 알 길이 없다. 여전히 일장춘몽. 오랜만에 듣는 헤비메탈. 마구 신나있는 나의 멘탈.


2013-08-06

8월 6일

1928년_재킷일러스트레이션의 최고봉 앤드워홀 탄생


 

벨벳 언더그라운드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롤링 스톤즈
「Sticky Fingers」
  
  이제는 CD의 시대도 어느덧 지나고 인터넷과 모바일을 활용한 다양한 형태의 음악 콘텐츠들이 과거의 매체들을 급속히 대체하고 있지만 사실 예전의 LP시절과 비교하면 뭔가 아쉬움이 큰 것도 사실이다. 과거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앨범이라는 형태로 소장하겠다는 욕구는 음악 팬들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욕구였고 그런 면엥서 본다면 멋스러운 재킷으로 눈길을 끌었던 LP시절이 가장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다. 큼직해서 보기에도 시원스러운 LP재킷은 그 그림과 사진만으로도 화제를 모으며 수집광들의 구매욕을 자극하곤 했다.
  앨범 재킷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일가를 이루었던 사람들은 여럿 있지만 그중 최고봉은 단연 앤드 워홀(Andy Warhol)이었다. 피츠버그 출신으로 대학에서 디자인을 공부한 그는 화가로도서도 활동했고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떨친 팝아트의 선구적인 인물이었지만 음악과 관련한 그의 경력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요약될 수 있다. 그 첫번째는 그가 전설적인 그룹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매니저 겸 프로듀서였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앞서 말한 것처럼 그가 앨범 재킷 일러스트레이션의 일인자였다는 사실.
  그가 만들어낸 굵직굺직한 앨범 재킷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데뷔 앨범 「The Velvet Underground & Nico」와 롤링 스톤즈의 앨범 「Sticky Fingers」가 가장 뛰어난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The Velvet Underground & Nico」는 바나나를 그린 실크스크린이 인상적이어서 이른바 '바나나 앨범'으로 불리는 명반이고 「Sticky Fingers」 역시 앨범 재킷에 실제 지퍼가 달려서 이것을 열면 앨범 속지에 팬티가 드러나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과연 앤디 워홀이라는 탄성을 자아내게 했던 작품이다.
  1928년 8월 6일은 재킷 일러스트레이션의 최고봉 앤디 워홀이 태어난 날이다.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벨벳 언더그라운드 & 니코
롤링 스톤즈
앤디 워홀

이미 예술의 상업화로 위대한 업적을 이루신 우리 워홀형님으로 배운 생각의 전환은 지금껏 화두가 되고있는 현실가 맞닿아있다. 단순히 예술이 고고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이 형님의 자서전을 읽어보길. 일명 '앤디워홀의 철학'. 각각의 앨범 속에 있는 상큼하게 띵동띵동 거리는 벨벳의 노래와 비틀즈와 유일하게 견줄 수 있는 영국 밴드 롤링의 노래를 한 곡씩 감상해 봅시다. 이 두 앨범을 모두 갖고 있는 나는 정말 영광입니다. 워홀형님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문득 워홀형님보니 모르핀 먹고 생을 마감하신 발터 벤야민 형님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책이 생각나고, 롤링 스톤즈 노래는 'sister morphine'이고, 참 갖가지 생각이 다나네.


2013-08-05

8월 5일

1957년_최초의 본격 음악 프로그램
   아메리칸 밴드스탠드의 시작


  1952년 미국 필라델피아 지역에서 시작된 아메리칸 밴드스탠드(American Bandstand)는 처음에는 그저 필라델피아 지역에서만 볼 수 있었던 일개 지역 방송 프로그램일 뿐이었다. 하지만 프로그램이 점점 인기를 더해가자 ABC방송은 아메리칸 밴드스탠드를 전국 방송으로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성공 여부를 놓고 다소 이견이 있었지만 결론은 가능성이 높다는 쪽이었고 마침내 1957년 8월 5일, 아메리칸 밴드스탠드는 미국 전역으로 첫 전파를 탔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아메리칸 밴드스탠드는 미국 전역으로 방송되기 시작한 지 불과 4주만에 시청률 1위를 기록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결과적으로 본격적인 음악 프로그램의 효시라는 평가 속에 팝음악사상 가장 중요한 방송 프로그램으로 남았다. 당시 아메리칸 밴드스탠드의 사회자가 바로 유명한 DJ 딕 클락(Dick Clark)으로, 앨런 프리드와 함께 DJ 전성시대를 열었던 주인공이다. 아메리칸 밴드스탠드는 탁월한 DJ 딕 클락이 있어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아메리칸 밴드스탠드의 인기 덕에 딕 클락이 전국구 스타가 될 수 있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어찌 되었던 간에 1957년 8월 5일, 미국 전역을 향해 첫 전파를 발사한 아메리칸 밴드슽앤드는 미국의 최장수 본격 음악 방송으로 1980년대 M-TV가 등장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던, 음악 프로그램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설적인 프로그램이다.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DJ Dick Clark & American Bandstand(USA)
미국에는 아메리칸 밴드스탠드(1989년 종영)가 있었다면, 대한민국에 최장수 음악프로그램은 전국노래자랑(2013년 현재 진행형). 대한민국 장수프로그램 중 당당히 2위를 기록하며 아직도 승승장구하는 이 프로그램을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 최고의 신랑이 송해선생님이라고 하던데....만 86세이신 지금도 당당히 방송을 하고 계셔서 그런듯 싶다. 여하튼. 각 나라의 국민프로그램은 하나씩 있어야지? 

DJ Song Hae & Jeonkook Noraejarang(South Korea)


2013-08-04

8월 4일

1956년_최고의 인기 흑인 그룹 플래터스


플래터스
「The Platters」
  샘 쿡의 <You send me>가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등극한 1957년 12월 2일은 흑인의 소울 음악이 최초로 빌보드 정상에 오른 역사적인 날로 기록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 이전에 흑인이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을 정복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소울 음악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플래터스(Platters)가 1956년 이미 두 차례나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을 정복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흑인 음악의 역사에서 플래터스(Platters)의 중요성은 두말할 것도 없다. 플래터스는 흑인 그룹으로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둔 최초의 그룹이기 때문이다. 1956년 8월 4일 플래터스의 최대 히트곡 <My prayer>가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라섰다. 5주 동안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머문 <My prayer>는 <The great pretender(후에 퀸의 리메이크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에 이은 그룹의 두 번째 빌보드 싱글 차트 넘버원 곡으로 흑인 그룹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곡이다.
  <The great pretender>로 포문을 열고 <My prayer>로 전성기를 열어젖힌 플래터스의 활약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50년대가 가기 전에 플래터스가 보여준 활약은 참으로 뛰어난 것이었는데 수많은 그들의 히트곡 중 특히 우리에게 친숙한 곡은 1958년 역시 빌보드 싱긍글 차트 넘버원을 기록한 <Smoke gets in your eyes>.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내가 아는 한 그들의 최고의 노래는 이것이다. 그들을 알기 전까지 이렇게 훌륭한 노래의 행방조차 찾지 못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알아버린 그들의 목소리를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정말 사랑스러운 노래이다. 제목이 'only you'. 마치 씨스타의 <only you>와는 사뭇다른 흑형과 누님들의 하모니를 보소. 

2013-08-03

8월 3일

1963년_비틀즈의 마지막 캐번 클럽공연


  영국의 리버풀은 지금은 많이 쇠락한 도시다. 한때 최대의 항구도시로 번성했던 리버풀은 이제 군데군데 폐허처럼 빈집이 흉흉하고 도시는 전체적으로 썰렁한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그런 리버풀에도 여전히 붐비는 몇몇 장소들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비틀즈(Beatles)와 관련된 곳들이다. 비틀즈 박물관, 그리고 캐번 클럽(Cavern Club)은 리버풀을 찾는 관광객들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필수 코스다. 리버풀은 영원한 비틀스의 고향인 것이다.
  1963년 8월 3일, 비틀즈가 캐번 클럽에서 자신들의 마지막 공연을 펼쳤다. 정확히 그들의 294번째 공연이었다. 캐번 클럽, 무명시절 비틀즈가 연주했던 곳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영국 최고의 관광 명소가 된 행운의 클럽이다. 한때 운영난으로 문을 닫기도 했지만 다시 문을 열고 지금도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







2002년_37년만의 귀환, 뉴포트에 돌아온 밥 딜런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은 최대의 포크 축제였지만 1965년 이후 어딘가 허전했다. 포크의 제왕 밥 딜런(Bob Dylan)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자기타를 손에 들고 무대에 올랐다 변절자로 몰린 1965년 이후 밥 딜런은 단 한 번도 뉴포트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만큼 충격이 컸던 것일까?
  밥 딜런의 뉴포트 보이콧은 그로부터 37년이 흐른 2002년 8월 3일에야 비로소 끝났다. 이날 밥 딜런은 37년 만에 뉴포트 무대에 올라 열정적인 공연을 펼침으로써 포크 팬들에게 또 하나의 감동적인 장면을 선사했다. 그리고 2%부족했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도 완성되었다.
  2002년 8월 3일,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은 밥 딜런의 귀환으로 비로소 흠결 없는 포크의 최대 축제로 거듭났다.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8월 3일에는 비록 어떠한 개인에게는 소소한 일이지만 그들의 이름값(name value)때문에 특별한 날이 되었다. 캐번 클럽에서 마지막 공연을 하게 된 비틀즈와, 37년만에 뉴포트로 귀환한 밥 딜런. 캐번 클럽은 그 후 리버플 최강의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하였다. 아래의 주소로 들어가면 현재 캐번 클럽의 공연일정과 시간을 볼 수 있다니 참고하도록.

늙어버린 밥 딜런형님. 나는 그의 젊은 시절의 모습이 좋긴하다만. 진정 약 강산이 4번정도 바뀔즈음, 다시 복귀한 그 무대는 어떠하였을까? 영어공부할 겸사겸사 찾아보았음. 마치 늙고 고향을 찾아간 그러한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그 당시의 평가와 지금의 평가를 비교해보기 위하였을까? 형님의 마음은 모르겠지만, 다시금 돌아온 형님은 나날이 세월이 흐를스록 간지남이 되어가는 것만은 사실인듯하다. 밑에는 당시 뉴포트콘서트 형님의 공연에 관한 리뷰 글이다. 셋 리스트도 나와있으니, 오늘은 오랜만에 밥 딜런 앨범이나 들어야겠다. Like a rolling stone. 요즘 인생이 구르는 돌같으니 말이다.

http://www.berkshirelinks.com/bob-dylan-concert-review-newport-folk-festival-aug-3-2002/

Setlist (thanks to Bill Pagel at BobLinks):
1. Roving Gambler (acoustic)
2. The Times They Are A-Changin’ (acoustic) (Larry on cittern)
3. Desolation Row (acoustic)
4. Mama, You Been On My Mind (acoustic) (Bob on harp)
5. Down In The Flood
6. Positively 4th Street
7. Subterranean Homesick Blues (Larry on slide guitar)
8. Cry A While (Larry on slide guitar)
9. Girl Of The North Country (acoustic) (Bob on harp)
10. Tangled Up In Blue (acoustic) (Bob on harp)
11. Mr. Tambourine Man (acoustic)
12. Summer Days (Tony on standup bass)
13. You Ain’t Goin’ Nowhere (Larry on pedal steel)
14. The Wicked Messenger (Bob on harp)
15. Leopard-Skin Pill-Box Hat
(encore)
16. Not Fade Away
17. Like A Rolling Stone
18. Blowin’ In The Wind (acoustic)
19. All Along The Watchtower

2013-08-02

8월 2일

1989년_솔로로서도 성공 가도를 이어간 피터 세트라


피터 세트라
「Solitude / Solitaire
  피터 세트라(Peter Cetera)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인기 그룹 시카고(Chicago)의 전성기를 이끈 간판 보컬리스트다. 그는 더할 수 없는 달콤한 미성으로 대중들의 귀를 사로잡았으며 그의 매력으로 인해 시카고는 인기 정상의 그룹으로 발돋음을 할 수 있었다. <If you leave me now>, <Hard to say I'm sorry>, <You're the inspiration>, <Stay the night> 등 시카고의 전성기를 화려하게 수놓은 히트곡들 모두 피터 세트라 재적시에 터져나온 것들이다.
  1985년 피터 세트라는 그룹의 17번째 앨범인 「Chicago 17」을 마지막으로 시카고를 탈퇴했다. 아무리 뛰어난 뮤지션이라도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그룹을 떠난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고 부담되는 일이다. 하지만 피터 세트라는 현실에 안주하는 대신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도전은 성공했다.
  피터 세트라는 솔로로 전향하자마자 1986년 8월 2일, <Glory of love>를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올려놓으며 솔로로서도 자신의 건재함을 만방에 과시했다. 「The Karate Kids, Part 2」의 주제가로 2주간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머물렀던 <Glory of love>는 그해 아카데미와 그래미에도 노미네이트되면서 피터 세트라의 위상을 한껏 곧추세웠다.
  1986년 8월 2일, 자신의 첫 번째 솔로 넘버원 곡 <Glory of love>로 솔로로서 힘찬 출발을 장식한 피터 세트라는 그해가 가기 전에 다시 에이미 그렌트와 듀엣으로 부른 <The next time I fall>을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려놓으며 일각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솔로로서도 탄탄한 성공의 기반을 쌓아갔다.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당시에 에이미 그란트는 이미 CCM계에서 여왕으로 재림했던 양반이지만, 일반적인 대중들에게는 낯선이였다. 그러나 피터 세트라와의 듀엣으로 인하여 그녀 또한 일반적 대중들에게 인지도를 쌓아나갔다고 한다. 원래는 피터 세트라의 앨범에만 실렸던 곡인데 이 곡으로 인해서 에이미 그란트 또한 엄청난 명성에 힘입어 에이미 그란트의 「The Greatest Hits」에도 수록되어 있다는데....역시 인생역전은 한방이지만, 인생역전을 마냥 바라보는 것은 옳지 않은 태도들이니 명심하시길..
 당시에 스타일이 청청인 것으로 보아, 올 가을 나도 청청으로 갈까싶기도 하고..

2013-08-01

8월 1일

1981년_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M-TV 개국



버글스
「The Ace Of Plastic」
  1981년 8월 1일 이전에는 음악은 듣고 즐기는 것이었다. 음악은 라디오를 통해 듣거나 혹은 금전적인 여유가 있다면 음반을 사서 들으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1981년 8월 1일 이후 음악은 듣는 것만이 아니라 보고 즐기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왜 1981년 8월 1일인가? 그것은 바로 이날이 혁명적 변화를 선도했던 M-TV가 개국, 첫 전파를 발사한 날이기 때문이다.
  M-TV의 개국은 팝 음악의 흐름을 바꿔놓은 일대 사건이었다. '비디오가 리디오 스타를 죽인다'라는 제목부터 의미심장한 버글스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의 뮤직비디오로 포문을 연 M-TV는 24시간 계속해서 뮤직 비디오만을 틀어주는 음악 전문 케이블 채널이었다.
  그 이전까지 가수들의 성공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라디오에서 그들의 노래를 얼마나 많이 틀어주느냐 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M-TV에서 그들의 뮤직 비디오를 얼마나 많이 틀어주느냐가 더욱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M-TV 등장 이후 가수들에게는 라디오보다 더 중요한 홍보수단이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뮤직비디오가 가장 중요한 홍보수단으로 등장하자 너나 할 것 없이 뮤직 비디오에 많은 돈과 공을 들였고 그 결과 수많은 비디오 스타들이 양산되기 시작했다. 음성보다는 잘생긴 용모와 화려한 무대 매너가 인기를 가늠하는 더 중요한 척도가 되는 부작용되 심화되었지만 음악 역시도, 특히 대중음악은, 다수 대중을 위한 엔터테인먼트의 일종이라고 본다면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흐림을 수도 있었다.
  M-TV의 초창기는 바다 건너 영국에서 건너온 듀란 듀란, 컬처클럽, 왬 등 이른바 뉴 로맨특 그룹들이 주도했지만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를 앞세운 미국세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또 본 조비, 포이즌, 스키드 로우 등 이른바 LA메탈 밴드 역시 M-TV의 수혜자들이었다. 이들은 기존의 거친 헤비메탈에 대중적인 말랑말랑한 멜로디 라인을 끌어들여 음악적인 면에서도 인기를 얻었지만 잘생긴 용모를 내세운 뮤직 비디오가 이들의 인기몰이에 큰 역할을 했던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다.
  M-TV의 등장은 명백하게 음악의 상업화를 가속화시키는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 누구도 M-TV와 뮤직 비디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그것을 무시하고는 시장에 견뎌낼 수가 없었다.






1971년_음악을 통한 구원,
방글라데시 기아 난민 돕기 콘서트


  1971년 8월 1일,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는 방글라데시 기아 난민들을 돕기 위한 초대형 콘서트가 개최되었다. 당시 연일 매스컴을 장식하던 방글라데시 기아 난민들의 소식을 접하고 충격을 받은 조지 해리슨에 의해 기획된 콘서트에는 링고 스타, 에릭 클랩튼, 밥 딜런, 배드핑거, 레온 러셀 등 당대의 슈퍼 스타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또 서구에 인도의 전통악기인 시타르를 소개한 장본인이며 조지 해리슨의 시타르 스승이기도 한 라비 상카도 힘을 보탰다. 입장료와 중계료를 포함한 모든 수입은 전액 방글라데시 난민 구호사업에 사용되었는데 이것이 사실상 1980년대 중반 'Band Aid'와 'Live Aid'등을 통해 최고조에 이른 팝 스타들의 합동 자선 공연의 효시였다.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M-TV의 개국이 과연 라디오의 종말을 예고했던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버젓이 라디오는 쏠쏠하게 잘 버티고 있다. 그렇다면 전자책이 종이책을 말아먹을까? 
해리슨 형님은 이미 동양의 모든 것과 서양의 모든 것을 절묘하게 혼합할 줄 아는 양반이었다는 것이다. 이미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밑에 글은 형님께서 멤버들 구하실 때 일화 중 일부이다.


-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식구였던 비틀스 멤버들이 가장 먼저였다. 존 레논에게 연락했다. 조지는 얼마 전까지 존의 솔로 앨범 < 이매진 > 세션에 참여해 우의를 다진 바 있었다. 하지만 존의 아내 요코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다. 조지 해리슨은 존 레논에게 요코 없이 혼자 와달라고 요청했다. 존도 처음에는 조지의 초대를 수락했지만 콘서트 날짜를 불과 며칠 남기지 않고 불참을 결정했다. 요코 오노에 따르면, 부부가 다 같이 출연하는 것을 놓고 남편과 다투고 난 뒤 결국 존 레논이 참가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감정이 남아있긴 했지만 조지 해리슨은 폴 매카트니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비틀스 해체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문제 때문에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매카트니는 해리슨의 초빙을 거절했다. 반면 링고 스타는 과연 대인배답게 의리를 지키며 이벤트에 동참했다. 

“방글라데시 콘서트에 와서 연주해줄 수 있는지 조지가 물어봤어요. 속으로 생각했죠. '맙소사. 어쩌라는 거야? 이제 막 해체했는데 다시 합치라고?' 과연 제정신인가 싶더라고요.” (폴 매카트니, < 롤링 스톤 >, 1974)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외에도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 같은 경우는 비자가 나오지 않아 섭외가 불가능했다. 조지 해리슨이 가장 공을 들인 출연자는 밥 딜런이었다. 해리슨만큼이나 대중들 앞에 나서기 싫어하던 딜런은 모시기도 힘들었지만 리허설까지 마치고도 끝까지 속 시원하게 연주하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아 애를 태웠다. 이윽고 조지 해리슨과 라비 샹카르는 점성술사에게 길일을 받아 8월 1일을 콘서트 날짜로 정했다. 그들이 알아본 장소 가운데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가든이 유일하게 그날 비었던 터라 해리슨이 그곳을 예약했다. 이어 플라자호텔 스위트룸을 근거지로 삼고 쇼를 준비했다. 뮤지션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고 모두 노개런티로 출연을 약속했다. 

- 고영탁의 조지 해리슨의 이야기 中 부분-

2013-07-31

7월 31일

1999년_폭우에 날아간 꿈, 아, 트라이포트여!



  1999년 7월 31일, 계획대로라면 그날은 한국 록의 신기원이 열리는 날이었다. 그 날은 한국에서 치러지는 세계적인 록 페스티벌의 가치를 내거너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이 열리는 날이었다. 8월 1일까지 이틀간의 일정으로 예정된 페스티벌에 참가를 약속한 라인업은 화려했다. 김종서, 김경호, 크래시 등 한국 최강의 밴드들은 물론이고 딥 퍼플,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드림 씨어터, 프로디지 등 그 이름만으로 세상을 쩌렁쩌렁 울리는 세계적인 팀들이 총출동할 예정이었다. 록 팬들의 기대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운명의 7월 31일, 이들을 만날 꿈에 부플어 인천 송도 공연장에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몰려들었찌만 불행히도 하늘은 우리편이 아니었다. 집중호우가 올 것이라던 예보가 틀리기를 모두 바랐지만 불행히도 그 잘 틀리던 일기예보가 이번에는 맞았다. 거의 폭우에 가까운 집중호우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공연장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무대에 오를 예정이었던 밴드들은 아예 공연을 취소하거나 혹은 무대에 올랐더라도 쏟아지는 폭우를 이기지 못하고 금방 공연을 중단하고 내려와야만 했다. 전설의 우드스탁 때도 비가 왔다고 자위하며 기다렸지만 하늘이 뻥 뚫린 듯 엉망이 되고 둘째 날 공연은 전면 취소되기에 이르렀다. 한국판 우드스탁이 꿈은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
  1999년 7월 31일, 그날의 처절한 실패는 한국 록 역사의 회한으로 남았지만, 시간이 흘러 2006년부터 시작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과 2009년부터 시작된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이 한국판 우드스탁의 꿈을 이어가고 있다.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대한민국 땅의 최초의 록 페스티벌에었던 트라이포트. 비록 하늘의 무심함으로 그 꿈들은 좌절되었지만, 당시에 라인업은 완전 후덜덜하다. 시작이 이렇게 고난으로 시작되었으니, 그 뒤를 이은 펜타나 지산은 성황리에 늘 진행되고 있다. 역시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성대하리라!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스무살의 011 TTL. 추억 돋소! 실황! 트라이포트에서 <Smoke on the water>연주 하시는 딥 퍼플 형님들! 비가 와도 끄떡없는 그들의 rock spirit. 


2013-07-30

7월 30일

1975년_피터 가브리엘의 제네시스 탈퇴


제네시스
「Trespass」
  제네시스(Genesis)의 활동은 피터 가브리엘(Peter Gabriel)이 재적했던 1기와 그가 탈퇴하고 필 콜린스가 주도했던 2기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 두시기의 제네시스는 음악적으로도 큰 차이가 난다. 피터 가브리엘 재적시에 다소 실험적인 프로그레시브 록 사운드를 선보였던 제네시스는 그가 탈퇴하고 필 콜린스가 주도권을 잡은 이후로는 보다 대중적인 팝 록사운드로 음악적 방향을 틀었다.
  그 분기점이 된 해는 1975년. 1975년 7월 30일, 피터 가브리엘이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제네시스를 탈퇴했음을 공식 인정했다. 이로써 얼마 전 피터 가브리엘이 제네시스를 탈퇴했다고 특종 보도했던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NME)'의 보도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피터 가브리엘은 이미 1974년 치러진 투어를 마지막으로 제네시스를 사실상 탈퇴한 상태였다.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피터 가브리엘


필 콜린스

제네시스의 보컬이었던 피터 가브리엘, 그리고 드러머였던 필 콜린스(중,후기에는 보컬까지도). 제네시스는 영국 상류층의 동창들이 만든 밴드라고 한다. 필 콜린스는 원래 다재다능하여 보컬, 드럼 심지어 연기까지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나, 피터 가브리엘의 보컬의 영향력으로 그는 코러스정도에만 그쳤다고 한다. 제네시스의 음악은 프로그레시브 락의 교과서라고 일커진다. 킹 크림슨(King Crimson)이 실험적인 측면에서 프로그레시브락의 특징을 상징한다면 제네시스는 화려하고 난해한 연주와 극적인 전개, 곡의 메시지, 컨셉 앨범 등의 일반적은 프로그레시브락의 특징을 실제 곡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구현하는지를 천재적으로 제시하였다. 즉, 프로그레시브락의 방법론을 구체화시킨 밴드이다. 이태리의 수많은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들이 제네시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말그대로 창세기같은 밴드이다.

2013-07-29

7월 29일

1946년_찰리 파커, 약에 취해 최고의 명연을 선보이다

찰리 파커
「Bird Lives」
  1946년 7월 29일은 재즈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 중 하나로 전해 오는 이른바 <러버 맨(Lover Man)>의 녹음이 있었던 날이다.
  재즈사에 빛나는 색소폰의 거장 찰리 파커(Charlie Park)의 삶은 질곡의 삶이었다. 그의 삶은 언제나 술과 마약으로 찌들어 있었다. 1946년에 찰리 파커는 미국 서부 지역에 머물고 있었다. 콘서트를 위해 당시 유명한흥행주였던 노먼 그랜츠가 이끄는 밴드를 따라 서부에 왔던 찰리 파커는 무슨 이유에선지 콘서트가 끝나고 다른 멤버들이 모두 동부로 돌아간 후에도 여전히 서부에 남아 있었다. 그는 그저 밤거리를 배회하고 작은 클럽을 찾아 즉흥적인 잼 세션을 벌이고 마약을 구하기 위해 뒷골목을 헤매며 방황하고 있었다. 마침 그 지역의 작은 레이블인 다이얼에서 레코딩 계약을 제의했고 약을 살 돈이 필요했던 찰리 파커는 별 생각 없이 다이얼의 제의를 승낙했다.
  그리고 1946년 7월 29일, 찰리 파커는 녹음에 들어갔다. 그러나 약물 중독과 이에 따른 정신분열이 심해지면서 찰리 파커는 녹음을 마친 직후 그만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녹음을 끝마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을 정도. 간신히 의식을 회복한 찰리 파커는 겨우 호텔로 돌아왔지만 담뱃불을 켠 채로 잠이 들었다가 호텔에 불을 내는 사고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그는 오랫동안 정신병원 신세를 져야 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날의 녹음은 찰리 파커의 생애 최고의 명연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찰리 파커의 디스코그래피에서 최고의 명반으로 평가받는 유명한 앨범 「Lover Man」이었다.
  찰리 파커의 오리지널 곡과 유명한 재즈 스탠다드 곡들이 적절히 혼합된 두 장짜리 앨범 「Lover Man」에서 찰리 파커는 약에 취한 상태에서도 절정의 연주력을 선보였는데 특히 「Lover Man」은 발라드에 능했던 찰리 파커의 장점이 극대화되어 나타나고 있는 명반이다.

[365일 팝음악사], 돋을새김, 정일서 지음]




찰리 파커
루이스 암스트롱
듀크 엘링턴

  
뮤지션과 약물은 떼어낼 수 없는 관계. 마치 술에 취해 사람의 언변이 조금이나마 뛰어나지듯이, 약물의 힘으로 자신의 역량이상을 발휘코자 하는 욕심(?)같은 것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 방법이 의도를 했던 의도를 하지 않았던 간에. 찰리 파커와 루이스 암스트롱, 듀크 엘링턴은 재즈의 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있는 3대 인물로 꼽힌다. 재즈는 브라스와 피아노가 없었다면 그리고 그것을 능숙하게 다룰줄 아는 그들이 없었다면, 영원히 그 자리에 머물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