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8-02

칠월 칠석





달력보니 오늘이 칠월 칠석이네.
견우와 직녀가 일 년에 단 한번 만나는 그 날.
서로 은하수에 가려져 만나지 못하던 그들은
오늘만을 서로 기다렸다네.

2014-07-31

《청춘》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현존하는 시인 중에 작고를 한 양반들을 제외하고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단연 심보선. 왠지 모를 여러가지의  찌질함을 구구절절하게 써나가는 것이 그의 시만의 매력일 것이다.
가장 중요한 모토는 그의 시에 있어서 '사랑'이라는 이 두 글자인데. 단연 이 '청춘'이라고 씌어진 시에서도 어김없이 사랑에 대한 시인의 생각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어김없이 올해도 태풍은 다가온다. 그리고 이제 주룩주룩 비를 내리기 시작하기 이전에 나는 창밖의 무지개를 보았다. 그 무지개는 지상에 있는 자를 하늘로 데려다 주는 다리임이 틀림없다. 밑바닥에 깔려있는 이 모든 것들이 진정한 이상향으로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진정으로 열망하는 것이 또한 '청춘'아닌가. 쓰디쓴 죄악들을 깨끗이 씻어버릴 면죄부가 있다면 나는 필연코 내 '청춘'을 팔아서라도 그것을 찾기 위해 나의 모든 정력들을 쏟을 것이다.




 

2014-07-29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Dawn of the Planet of the Apes, 2014)

 (스포가 있으니 다소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올 여름 나의 발걸음과는 무관할 것으로 생각되던 극장가. 그러나 방학도 했고, 7월 달에 목표한 것은 다 이루었으니, 스스로에게 선물을 하나 해줄 터. 간만에 극장을 방문했다. 꽤나 좋더군. 오랜만에 가니. 극장에 다녀온 친구들이 '혹성탈출 이번에 나온게 대박이다.', 혹은 '별로다.'라는 반응을 뒤로한 채, 우선 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오리지날의 간지가 있으니까. 비록 리메이크작 1편을 보지 못하였지만 말이다.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시저(앤디 서키즈 분)의 눈동자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여러가지의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그것은 휴머니즘, 평화, 인간의 무한한 욕심과 생존하고자 하는 의지력, 야생에 대한 두려움 등.  크게 유인원들에 대한 생각, 인간에 대한 생각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 두 영역들을 함께 고찰한 생각들을  나열할 것이다.


  유인원들은 이미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고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는 사회적 룰에 적응하면서 살아간다. 그들의 리더는 시저. 야생의 왕국에서 그렇듯 힘이 가장 센 자의 말을 듣는 것이 이 곳의 법칙이다. 모든 유인원들은 시저의 말에 순응하며 지낸다. 어떠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가 반드시 필요한데 그것의 기초는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라는 그들만의 위대한 명분이다. 그리고 그것에 맞게 시저는 그들의 무리를 효과적으로 잘 운영한다. 그러나 사회에는 항상 반동분자가 존재하기 마련. 이는 코바(토비 켑벨 분)로 나타나진다. 시저는 인간에 대한 애정, 즉 휴머니즘의 감정과 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한 명분을 적절히 내세우고 인간과 유인원들의 평화를 지키고자 하는 사나이지만, 코바의 마음 속에 남아있는 것은 철저한 인간들에 대한 증오심이다. 결국 코바는 리더인 시저를 총으로 저격하고, 인간들이 시저를 죽였다는 새로운 명분을 내세운다(그들의 세계에서 리더가 사살당했다는 새로운 명분만큼 사회적 동요를 일으키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니까). 그리고 코바를 중심으로 하여 인간들의 세계를 정복하러 나선다. 결국 이 유인원 내부에서도 현재의 인간들이 갖고 있는 감정들을 그대로 나타난다. 오히려 그들은 페르소나를 모두 벗어던진 채 야생 본연의 감정을 서슴없이 나타낸다. 그것은 가장 진솔한 감정의 표출이다. 또한 어떠한 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철저한 명분이 필요하며 그 명분을 위해서는 희생양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보여준다(시저는 코바를 반동분자로 인식하면서도 다른 유인원들, 즉 대중의 앞에서 그를 직접적으로 죽이지 않지만, 코바는 새로운 명분을 위해서 시저를 총으로 쏘고 그것으로 인해 대중들의 동요를 이끌어낸다).


  바이러스 후 10년, 소수의 인간들만이 살아가는 인간의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이 삶을 영원히 영위하기는 너무나 어려운터. 전기공급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서 그들에게 전기를 공급받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유인원 도시에 있는 댐(인간 욕망의 물체)을 가동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우연치 않게 유인원의 도시로 접근한다.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전기를 공급받기 위해서. 그리고 가장 강인한 인간의 의지를 보여주는 사나이 말콤(제이슨 클락 분)은 그들의 리더 시저와의 협상을 하기 위해 유인원의 도시로 들어간다. 그리고 말콤은 시저와의 협상을 통해 유인원의 영역에서 댐을 가동시키기 위해 며칠간 머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결국 댐을 가동시키는데 성공한다. 인간의 강인한 자의지가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뛰어난 진보를 이룩한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들은 퇴보를 하는 방법을 절대적으로 잊어버렸다. 즉, 그들이 필요에 의해서, 좋은 사회를 영위하기 위해서 신진 문물들을 발달시켰지만, 이제는 그것이 없으면 절대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결국 그 이전의 단계 즉, 전기가 없어도 영위할 수 있는 생활의 방식은 그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지 오래이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유인원들의 모습은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의 모습과 그 구성원들의 모습을 그대로 대변한다. 이데올로기의 적합성과 그것을 유지시키기 위한 명분, 또한 휴머니즘의 실현과 평화에 대한 열망. 이 중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 지는 여전히 논란거리이다. 유인원들의 모습이 오히려 현존하는 인간들의 모습보다 더욱 솔직하게 표현되었다. 인간의 모습과 야생의 모습을 적절하게 잘 믹스시켜놓은 듯하다. 또한 인간에게 있어서 지나친 기술 진보는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킴을 우리에게 각성시킨다. 이는 추후 인간의 의지로 인해 발달한 기술들로 인하여 인간 스스로가 자멸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메시지들은 여전히 인간중심주의에 머물고 있으며, 인간의 잣대로 모든 것을 평가한 것이다. 분명히 이 시리즈 마지막 편에는 분명히 인간이 승리할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의 의지와 무한한 가능성을, 자멸하는 인간이 아닌 절대적인 인간을 형상화하는 것이 미국발 상업영화의 최종 목적일테니까.



- 개인적인 서사력 자체가 전체적으로 기술력이 뛰어난 CG에 미치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것은 단순함의 문제가 아니라 뻔함의 문제이며, 서사력 자체가 좀 더 악질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남아있다.

- 오리지날 자체가 5편까지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2011년부터 리메이크된 이 작품 또한 5편까지 나올 것을 예상되는바. 스타워즈 시리즈에 이은 새로운 SF 리메이크 작에 대한 기대감을 조금이나마 갖고있다.

2014-06-22

사랑 추억만큼...

진실로 스스로 생각하기에 퍽 멋진 연애는 아니였으나, 
값진 연애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기억은 스며들지만 추억은 가장 진하게 남는 법. 
그 추억들을 잊을 수 있을까. 
앞으로 삶을 살아가면서 말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설레였다. 
고마웠다. 이제는 잠시 쉬려한다. 땡큐. 
항상 신의축복이 함께하길. 그리고. 건강해!






2014-05-18

<아Q정전>과 허세 이데올로기에 대한 생각

루쉰
<아Q정전>


  중국의 대문호 루쉰이 1921년에 발표한 단편소설로써 이 작품은 중국 한문학의 전통적 장르인 전(傳) 형식을 변형시켜 신해혁명이 일어나던 무렵의 중국 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아Q는 서구 열강의 침략 앞에 속수무책으로 남아 있던 중국인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Q는 30여 년의 생애를 통해 온갖 세상 풍파를 겪었으면서도 마지막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까지 자신의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지 않고 근거 없는 우월감이나 자기 비하로 일관함으로써 생애를 비참하게 마감한다. 그는 건달의 행패에 대해서 상황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아닌 ‘노려보기’라는 수법과 ‘정신적 승리’법을 통해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합리화 시킨다. 남에게 모욕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아Q는 상대를 평가해보고 어눌한 자 같으면 욕을 했고 힘이 약한 자 같으면 때렸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아Q가 손해를 보는 때가 많았다. 그래서 그는 차츰 방침을 바꾸어 대개는 화난 눈으로 노려보기로 했다.”
  하지만, 아Q가 이렇게 노려보기 주의(主義)를 채택한 후에 웨이주앙[미장(未莊)]의 건달들은 더욱더 그를 놀려대었고, “마침내는 때리기까지 했다. 아Q는 형식상으로 패배했다. 건달들은 그제야 만족해하며 의기양양하게 돌아갔다. 아Q는 잠시 선 채로, “나는 자식에게 맞은 셈 치자. 요즘 세상은 정말 개판이야…….”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나서는 그도 만족하며 의기양양하게 돌아갔다.”라는 일종의 정신 승리법을 통해 스스로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이는 자신의 상황을 이성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채 스스로가 자위행위와 더불어 자만감에 빠진 중국인들이 모습이 곧 아Q인 것이다. 중국은 과거 세계의 중심으로 자부하며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지닌 나라였다. 그러나 당시 청나라의 쇠퇴와 외세들의 침입 그리고 중국내부의 혁명으로 인해 자멸해가고 피폐해져 있는 상태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중국인들은 여전히 예전의 명성만을 운운하며 새로운 변혁의 시대를 정상적으로 인지하지 못한 채 머물러있었다. 이로 인해, 스스로 정체성의 혼란을 일으키게 되며 그들은 더욱더 자신들의 자위행위를 확고하게 정당화 시킨다. 이러한 점에서 당시의 중국인들과 아Q를 동일시할 수 있다. 이는 당시 반식민지가 되어 있던 중국의 사회적 상태에 대한 준렬한 비판이다. 민족적 위기 속에서도 근거 없는 우월 의식, 즉, 끊임없이 놀리거나 맞으면서도 자기를 경멸하면서 위기를 벗어나고자 하는 자존심, 자신보다 약한 상대에게 힘을 과시하는 비열함, 여기저기 붙어 다니며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는 기회주의적 태도는 당시 중국인들에게 만연해 있는 자세에 대하여 루쉰은 일침을 가한 것이다.
 
  당시 중국인들이 가졌던 생각은 비단, 당시의 중국으로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된다. 소위 ‘아무것도 없으면서 허세’를 부리는 태도, 즉 ‘허세 이데올로기’를 우리는 쉽게 관찰할 수 있다. 허세란 ‘실속없이 겉으로만 드러 보이는 기세’를 의미한다. 그 일례로 ‘없어도 있는 척’, 현실과 다른 실제의 삶이 만연해 있는 현실이 그러하다. 아무리 중고차라도 좋은 차를 타야 좋은 대우를 받고 아이들도 유행에 따른 옷과 학원 등의 소비를 해야 인정받고 무리에 낄 수 있다. 이는 타인의 시선에만 신경을 쓰고 스스로의 사고와 내실을 상실한 채, 상호의존성을 중요시여기는 대한민국 사회의 또 다른 병폐이다. 또한 보통의 나이가 많으신 어르신들의 말투에는 자연스레 ‘이것들아~ 우리 때에는 말이야’ 혹은 ‘내가 왕년에~’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물론 그들의 말에는 과거 추억에 대한 회상의 역할을 하고 어린 학생들에게 지혜와 지식을 전달해주기 위한 차원이지만 그 이면의 무의식 속에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 타성에 젖어있는 모습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국민들의 인식 속에서도 일종의 허세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나 인물에 대하여 본질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 그것에 대한 껍질, 단순히 대중매체에서 등장하는 유행, 혹은 또래집단에 만연해 있는 현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인 것이다. 이는 개인의 비판적 사고를 마비시킨다는 점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다.
  과거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고 물리적 폭력을 정당화하였던 시절이 있었다. 이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즘(Nazism) 혹은 파시즘(Fascism)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물리적 폭력을 동반한 명분의 허구성은 고통을 통해 쉽게 인지된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은 쉽게 인지되지 않는다. 루쉰이 비판하고자 했던 당시의 중국인들은 그 사회에 만연해 있는 생각, 즉, 쇠퇴해가고 있는 중국이 아닌, 찬란했던 시절의 중국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허세를 정당화시키는 이데올로기 폭력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과거 독일의 나치즘의 물리적 폭력의 희생양이 되었던 유태인들 혹은 사회를 뒤덮고 있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잃어버린 당시의 중국인들, 이것은 형태만 다를 뿐 엄연한 폭력이다.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희생양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이미 윤리적인 정당성을 상실한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긴요한 것은 그들의 정신을 개조하는 일이다. 그리고 정신 개조를 잘 이룩할 수 있는 길은 문예다”라고 말한 작가의 말처럼 루쉰은 진정으로 당시의 중국 국민들이 갖고 있던 허세 이데올로기의 폭력으로부터 자국민을 진정으로 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Q로 형상화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비가시적인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촉구한 것이다.
  현대 사회의 만연해 있는 여러 형태의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비판적 의식을 마비시키고 타율적 존재로 전락시킨다는 점에서 분명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다. U. 에코가 《대중의 영웅》에서 지적한 것처럼 사소한 일상생활의 영역이라도 정치화하고 탈자연화하는 의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다양하게 분산되고 은폐되어 있는 현대적 이데올로기의 특성을 고려할 때 저항보다 우선적인 것은 인식이다. 구속에 대한 인식없는 자유에의 욕망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영화 《메트릭스》의 교훈은 그 어느 때보다 현실적이다 : “진정 메트릭스를 벗어나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이 메트릭스 안에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2014-02-07

형도횽아♥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얽눌을 한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를 흘러넘쳤다
택시 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떄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저 극장에서 어떤 시인이 심야 상영을 보다가 죽었다면서요?」
「그 시인 이름이 뭐더라. 기, 기형, 기형도라 했지. 시집이 베스트에 오르고 해서 뭔가 하고 지난 여름에 사보기도 했지. 제목부터가 죽음을 연상시키는 것이더군.≪입속의 검은 잎≫」
「나도 사볼까 했는데 제목이 너무 섬뜩해서 사지는 않고 서점에서 <입속의 검은 잎>이라는 시만 몰래 훔쳐보았죠. 6·10 항쟁 전후한 장례식, 그러니까 이한열 장례식 같은 것을 묘사한 시이던데 다른 구절들은 기억이 안나고 마지막 구절은 지금도 기억나요.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수혜가 읊조리는 그 구절에 대한 기억이 나의 뇌리에서도 새삼 떠올라왔다.
「그래, 그 구절 나도 생각나. 그 시를 읽으면서 입 속에 매달린 검은 잎이 무얼까 생각해보았지.」
「나도 생각해보았는데요, 입 속에 잎처럼 매달려 있는 것이라곤 혀 밖에 없잖아요. 그래 나는 혀라고 생각했죠. 금은 혀니까 타버린 혀, 불의 앞에서도 침묵할 수밖에 없는 혀가 되는 거죠. 그건 이한열 같은 투사들의 혀와 대조되는 것이죠. 어때요, 내 해석?」
「침묵의 혀, 타버린 혀로 해석하는 걸로 보니 수혜도 꽤 시를 볼줄 아는 것 같은데, 그 시에서도,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 운운한 구절이 나오지. 그러니까 침묵의 혀는 하인의 혀라고도 할 수 있지. 그리고 그 시에서 검은 잎이라는 말이 세 번 나오고 있는데, 한번은 책과 연결되어 이쏙 또 한번은 백색의 장례 차량과 연결되어 있고 마지막 한번은 입과 연결되어 있지. 첫 번째는 그것이 무엇을 지시하는지 파악하기가 힘들지만 아마도 광주사태와 같은 구조적인 폭력 앞에서 휴지처럼 무기력한 책갈피들을 의미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이렇게보면 여기서도 침묵의 이미지와 연관이 있지. 두 번째는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고 했으니 검은 만장(輓章)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여기서는 침묵의 이미지와 함께 죽음의 이미지까지 포함하고 있는 거지.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입 속의 검은 잎 역시침묵의 혀인 동시에 죽음의 혀라고 할 수 있지. 입속에 검은 만장처럼 쳐져 있는 혀. 그 상태를, 악착같이 매달린 것으로 표현했으니 검은 잎은 일종의 거머리같은 세력으로 볼 수 있지. 삶 속으로 악착같이 파고드는 죽음의 세력. 우리가 불의한 폭력 앞에서 침묵하는 이유도 그 죽음의 세력 때문이지. 우리가 두려운 것은 죽음 자체라기보다 죽음으로 인하여 비굴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삶의 온갖 양태인 것이지. 그것을 시인도 두려워하고 있는 거지. 내 잎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참으로 어두운 이야기군요.」
「그 시인의 시들은 결국 입 속의 검은 잎으로 부른 검은 노래들이라고 할 수 있지. 대부분 어둡고 절망적이지.」
거대한 절망의 덩어리처럼 어둠 속에서 있는 파고다 극장을 지나, 차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도로를 건넜다. 이미 하룻밤 숙박비를 지불한 그 여관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굽어도는 골목 골목에는 검은 만장들이 가득 깔려 있었다. 하늘에는 검은 만장들이 차일처럼 펼쳐져 펄럭거렸다. 우리는 그 길과 하늘을, 방금 밝혀진 조그만 사랑의 등불 하나로 비추며 걸어나갔다.

                                                                       - 조성기 소설 ‘존재하려는 경향에 대하여’中 에서 -



뽕2를 보시다 피카리디에서 훅 가신 우리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