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comment, please do not ask me. i need just times.
2014-06-28
2014-06-22
사랑 추억만큼...
진실로 스스로 생각하기에 퍽 멋진 연애는 아니였으나,
값진 연애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기억은 스며들지만 추억은 가장 진하게 남는 법.
그 추억들을 잊을 수 있을까.
앞으로 삶을 살아가면서 말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설레였다.
고마웠다. 이제는 잠시 쉬려한다. 땡큐.
항상 신의축복이 함께하길. 그리고. 건강해!
값진 연애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기억은 스며들지만 추억은 가장 진하게 남는 법.
그 추억들을 잊을 수 있을까.
앞으로 삶을 살아가면서 말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설레였다.
고마웠다. 이제는 잠시 쉬려한다. 땡큐.
항상 신의축복이 함께하길. 그리고. 건강해!
2014-05-18
<아Q정전>과 허세 이데올로기에 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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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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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Q정전> |
중국의 대문호 루쉰이 1921년에 발표한 단편소설로써 이 작품은 중국 한문학의 전통적 장르인 전(傳) 형식을 변형시켜 신해혁명이 일어나던 무렵의 중국 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아Q는 서구 열강의 침략 앞에 속수무책으로 남아 있던 중국인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Q는 30여 년의 생애를 통해 온갖 세상 풍파를 겪었으면서도 마지막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까지 자신의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지 않고 근거 없는 우월감이나 자기 비하로 일관함으로써 생애를 비참하게 마감한다. 그는 건달의 행패에 대해서 상황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아닌 ‘노려보기’라는 수법과 ‘정신적 승리’법을 통해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합리화 시킨다. 남에게 모욕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아Q는 상대를 평가해보고 어눌한 자 같으면 욕을 했고 힘이 약한 자 같으면 때렸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아Q가 손해를 보는 때가 많았다. 그래서 그는 차츰 방침을 바꾸어 대개는 화난 눈으로 노려보기로 했다.”
하지만, 아Q가 이렇게 노려보기 주의(主義)를 채택한 후에 웨이주앙[미장(未莊)]의 건달들은 더욱더 그를 놀려대었고, “마침내는 때리기까지 했다. 아Q는 형식상으로 패배했다. 건달들은 그제야 만족해하며 의기양양하게 돌아갔다. 아Q는 잠시 선 채로, “나는 자식에게 맞은 셈 치자. 요즘 세상은 정말 개판이야…….”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나서는 그도 만족하며 의기양양하게 돌아갔다.”라는 일종의 정신 승리법을 통해 스스로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이는 자신의 상황을 이성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채 스스로가 자위행위와 더불어 자만감에 빠진 중국인들이 모습이 곧 아Q인 것이다. 중국은 과거 세계의 중심으로 자부하며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지닌 나라였다. 그러나 당시 청나라의 쇠퇴와 외세들의 침입 그리고 중국내부의 혁명으로 인해 자멸해가고 피폐해져 있는 상태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중국인들은 여전히 예전의 명성만을 운운하며 새로운 변혁의 시대를 정상적으로 인지하지 못한 채 머물러있었다. 이로 인해, 스스로 정체성의 혼란을 일으키게 되며 그들은 더욱더 자신들의 자위행위를 확고하게 정당화 시킨다. 이러한 점에서 당시의 중국인들과 아Q를 동일시할 수 있다. 이는 당시 반식민지가 되어 있던 중국의 사회적 상태에 대한 준렬한 비판이다. 민족적 위기 속에서도 근거 없는 우월 의식, 즉, 끊임없이 놀리거나 맞으면서도 자기를 경멸하면서 위기를 벗어나고자 하는 자존심, 자신보다 약한 상대에게 힘을 과시하는 비열함, 여기저기 붙어 다니며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는 기회주의적 태도는 당시 중국인들에게 만연해 있는 자세에 대하여 루쉰은 일침을 가한 것이다.
당시 중국인들이 가졌던 생각은 비단, 당시의 중국으로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된다. 소위 ‘아무것도 없으면서 허세’를 부리는 태도, 즉 ‘허세 이데올로기’를 우리는 쉽게 관찰할 수 있다. 허세란 ‘실속없이 겉으로만 드러 보이는 기세’를 의미한다. 그 일례로 ‘없어도 있는 척’, 현실과 다른 실제의 삶이 만연해 있는 현실이 그러하다. 아무리 중고차라도 좋은 차를 타야 좋은 대우를 받고 아이들도 유행에 따른 옷과 학원 등의 소비를 해야 인정받고 무리에 낄 수 있다. 이는 타인의 시선에만 신경을 쓰고 스스로의 사고와 내실을 상실한 채, 상호의존성을 중요시여기는 대한민국 사회의 또 다른 병폐이다. 또한 보통의 나이가 많으신 어르신들의 말투에는 자연스레 ‘이것들아~ 우리 때에는 말이야’ 혹은 ‘내가 왕년에~’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물론 그들의 말에는 과거 추억에 대한 회상의 역할을 하고 어린 학생들에게 지혜와 지식을 전달해주기 위한 차원이지만 그 이면의 무의식 속에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 타성에 젖어있는 모습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국민들의 인식 속에서도 일종의 허세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나 인물에 대하여 본질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 그것에 대한 껍질, 단순히 대중매체에서 등장하는 유행, 혹은 또래집단에 만연해 있는 현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인 것이다. 이는 개인의 비판적 사고를 마비시킨다는 점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다.
과거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고 물리적 폭력을 정당화하였던 시절이 있었다. 이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즘(Nazism) 혹은 파시즘(Fascism)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물리적 폭력을 동반한 명분의 허구성은 고통을 통해 쉽게 인지된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은 쉽게 인지되지 않는다. 루쉰이 비판하고자 했던 당시의 중국인들은 그 사회에 만연해 있는 생각, 즉, 쇠퇴해가고 있는 중국이 아닌, 찬란했던 시절의 중국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허세를 정당화시키는 이데올로기 폭력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과거 독일의 나치즘의 물리적 폭력의 희생양이 되었던 유태인들 혹은 사회를 뒤덮고 있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잃어버린 당시의 중국인들, 이것은 형태만 다를 뿐 엄연한 폭력이다.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희생양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이미 윤리적인 정당성을 상실한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긴요한 것은 그들의 정신을 개조하는 일이다. 그리고 정신 개조를 잘 이룩할 수 있는 길은 문예다”라고 말한 작가의 말처럼 루쉰은 진정으로 당시의 중국 국민들이 갖고 있던 허세 이데올로기의 폭력으로부터 자국민을 진정으로 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Q로 형상화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비가시적인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촉구한 것이다.
현대 사회의 만연해 있는 여러 형태의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비판적 의식을 마비시키고 타율적 존재로 전락시킨다는 점에서 분명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다. U. 에코가 《대중의 영웅》에서 지적한 것처럼 사소한 일상생활의 영역이라도 정치화하고 탈자연화하는 의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다양하게 분산되고 은폐되어 있는 현대적 이데올로기의 특성을 고려할 때 저항보다 우선적인 것은 인식이다. 구속에 대한 인식없는 자유에의 욕망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영화 《메트릭스》의 교훈은 그 어느 때보다 현실적이다 : “진정 메트릭스를 벗어나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이 메트릭스 안에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2014-02-07
형도횽아♥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얽눌을 한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를 흘러넘쳤다
택시 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떄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저 극장에서 어떤 시인이 심야 상영을 보다가 죽었다면서요?」
「그 시인 이름이 뭐더라. 기, 기형, 기형도라 했지. 시집이 베스트에 오르고 해서 뭔가 하고 지난 여름에 사보기도 했지. 제목부터가 죽음을 연상시키는 것이더군.≪입속의 검은 잎≫」
「나도 사볼까 했는데 제목이 너무 섬뜩해서 사지는 않고 서점에서 <입속의 검은 잎>이라는 시만 몰래 훔쳐보았죠. 6·10 항쟁 전후한 장례식, 그러니까 이한열 장례식 같은 것을 묘사한 시이던데 다른 구절들은 기억이 안나고 마지막 구절은 지금도 기억나요.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수혜가 읊조리는 그 구절에 대한 기억이 나의 뇌리에서도 새삼 떠올라왔다.
「그래, 그 구절 나도 생각나. 그 시를 읽으면서 입 속에 매달린 검은 잎이 무얼까 생각해보았지.」
「나도 생각해보았는데요, 입 속에 잎처럼 매달려 있는 것이라곤 혀 밖에 없잖아요. 그래 나는 혀라고 생각했죠. 금은 혀니까 타버린 혀, 불의 앞에서도 침묵할 수밖에 없는 혀가 되는 거죠. 그건 이한열 같은 투사들의 혀와 대조되는 것이죠. 어때요, 내 해석?」
「침묵의 혀, 타버린 혀로 해석하는 걸로 보니 수혜도 꽤 시를 볼줄 아는 것 같은데, 그 시에서도,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 운운한 구절이 나오지. 그러니까 침묵의 혀는 하인의 혀라고도 할 수 있지. 그리고 그 시에서 검은 잎이라는 말이 세 번 나오고 있는데, 한번은 책과 연결되어 이쏙 또 한번은 백색의 장례 차량과 연결되어 있고 마지막 한번은 입과 연결되어 있지. 첫 번째는 그것이 무엇을 지시하는지 파악하기가 힘들지만 아마도 광주사태와 같은 구조적인 폭력 앞에서 휴지처럼 무기력한 책갈피들을 의미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이렇게보면 여기서도 침묵의 이미지와 연관이 있지. 두 번째는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고 했으니 검은 만장(輓章)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여기서는 침묵의 이미지와 함께 죽음의 이미지까지 포함하고 있는 거지.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입 속의 검은 잎 역시침묵의 혀인 동시에 죽음의 혀라고 할 수 있지. 입속에 검은 만장처럼 쳐져 있는 혀. 그 상태를, 악착같이 매달린 것으로 표현했으니 검은 잎은 일종의 거머리같은 세력으로 볼 수 있지. 삶 속으로 악착같이 파고드는 죽음의 세력. 우리가 불의한 폭력 앞에서 침묵하는 이유도 그 죽음의 세력 때문이지. 우리가 두려운 것은 죽음 자체라기보다 죽음으로 인하여 비굴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삶의 온갖 양태인 것이지. 그것을 시인도 두려워하고 있는 거지. 내 잎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참으로 어두운 이야기군요.」
「그 시인의 시들은 결국 입 속의 검은 잎으로 부른 검은 노래들이라고 할 수 있지. 대부분 어둡고 절망적이지.」
거대한 절망의 덩어리처럼 어둠 속에서 있는 파고다 극장을 지나, 차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도로를 건넜다. 이미 하룻밤 숙박비를 지불한 그 여관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굽어도는 골목 골목에는 검은 만장들이 가득 깔려 있었다. 하늘에는 검은 만장들이 차일처럼 펼쳐져 펄럭거렸다. 우리는 그 길과 하늘을, 방금 밝혀진 조그만 사랑의 등불 하나로 비추며 걸어나갔다.
- 조성기 소설 ‘존재하려는 경향에 대하여’中 에서 -
뽕2를 보시다 피카리디에서 훅 가신 우리 형.
2014-02-05
'아침의 문'(박민규)와 '포르트 리가트의 성모'(살바도르 달리)에 관한 고찰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탄생, 생성 혹은 제조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 세상에서 언젠가는 지극히 언젠가는 사라지기 마련이다. 인간 또한 그렇다. 누군가가 태어나는 자가 있으면 누군가는 죽음을 맞이하는 자가 있기마련. 탄생과 죽음의 메타포 속에서 이 소설은 극적인 만남을 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상반된다는 것이 서로를 마주치는 순간 그 관계 속에서 마주치는 말이나 글로는 형용할 수 없는 그 무언가(something). 참으로 낯설다. 그리고 어렵다. 이 소설을 읽어 내려가면서 문득 인간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우리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사회 속에 약속인 '인간존엄성'에 대한 생각. 차마 뭐라고 표현하기도 힘들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라는 저서에서 이야기했던가.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해야만 한다'고. 그 책에서 이 말이 담고있는 명확한 의미는 어떤 누구도 파악할 수 없는 터. 왜냐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아니니까.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함부로 '죽음'에 대해서 말할 수 는 없을 것이다. 왜냐 그것은 우리가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탄생'에 대해서 논할 자격이 있는가? '탄생'에 대해서도 지극히 그 기억은 까마득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논리정연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마도 살바도르 달리라면 모르겠지만. 그는 매번 '나는 태아였을 때를 기억한다'라고 큰 소리치던 광기에 젖은 천재화가였으니까. 그렇다. '탄생'과 '죽음'이라는 현상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그것의 느낌이 어떠한지, 어떠한 구체적 경험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신뿐일 것이다.
삶의 대한 모멸감., '죽음'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그 자세는 분명히 그릇된 자세일터이지만, 그닥 삶을 증오하는 사람들은 간간히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삶'의 반대어는 '죽음'이니까. 그러나 이 책에서 나와있듯 이 세상에서 '절대 믿어선 안될 것은
삶을 부정하는 인간의 나 자살할 거야. 란 떠벌림이다. 그런 인간이 가야 할 길은 알콜릭 정도가 적당하다. 삶을 인정하지 않고선 실제로 자살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랄까. 결혼을 한 인간만이 이혼을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다.(p.16)'
스스로 세상의 의욕없이 자살을 하기위해 문을 여는 사람과 굳이 살고싶지 않은 세상사이지만 마지못해 이 세상에 자궁이라는 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의지'와 마지못해도 살아야만 한다는 '의지'와의 대결이다. 자극으로써 충동을 억제하고 의지와 의지와의 대결에서 끝까지 승리하는 것은 후자이다. 본질적으로 탄생이 없었다면 죽음 또한 맞이할 수 없을 터.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동일선상에서의 의미없는 충돌일 뿐이다. 무엇이 자명한 진리인지는 여전히 나는 모르겠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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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바도르 달리 『포르트 리가트의 성모』(1949) |
'바다를 여자의 자궁과 동일선상에 배치한 화가에 살바도르 달리가 잇다. 영문 모를 이 세계와 자신을 구분하기 위해 시계를 엿가락처럼 늘여 빼고, 달걀에 자욱이 달라붙는 개미떼에 집착하면서 일생을 보냈던 이 화가가 소년시절의 어떤 꿈에서 바다와 어머 가 성모로, 자신이 그 태아인 성자로 사각의 요람 속에 들어앉아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어머니를 껴안았을 때의 그 충일감이 그제야 자신을 객관화시켜 준다는 사실을 섬광처럼 깨달았던 것이리라. 그것은 또 탄생과 죽음이 동일선상에 놓인다는 깨달음이기도 하다.'
위의 간단한 단락의 글은 내가 제일 사랑하는 작가 중 한명인 이제하 선생의 글이다. 그는 바다와 여자의 자궁을 동일 선상에 배치한 화가라고 이야기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살바도르 달리는 아내인 갈라를 맹목적이고 유아적으로 사랑을 했다. 그에게 있어서 갈라는 뮤즈 그 이상의 의미였다. 그녀의 품에 안겨있는 달리는 결국 자신 또한 갈라의 자궁에서 태어난 것이며 즉, 하나의 문을 열고 이 세계에 나왔음을 상징한다. 글에서의 '아침'의 의미는 살바도르 달리의 '바다'와 같은 의미일 것이다. 그것은 모든 생명들을 깨우고 하루의 활기참을 시작하는 우리 마음 속의 잔잔한 바다와 같은 지극히 고요한 울림일 것이다.
2014-01-14
가만히 문득.
2014-01-11
이상문학상작품집
제1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초판본이 도착함과 함께 현재 이 세상에 나온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모두 모으게 되었으니 다른건 모르겠지만 수집욕정은 여전히 건재하다 1977년 김승옥을 시작으로 2013년 김애란까지.
제1회 대상작이 '서울의 달빛0장'인데, 여기에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다. 이어령 선생이 김승옥형을 호텔에 가둬두었다고 한다. 모든 숙식은 본인이 제공할테니 집필에만 몰두해달라고. 그렇게 해서 등장한 작품이 '서울의 달빛 0장'. 승옥이형이 말씀하시길 원래 소설의 제목은 '서울의 달빛'이었다고 한다. 그 소설의 서문의 의미에서 뒤에 0장이라 붙였다 한다. 그러나 이어령 선생은 그 다음의 이야기, 즉, 1장은 김승오겡게 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 그 소설의 소문조차 훌륭한 단편소설이라 생각하여 원 소설의 서문을 출간한다. 그리고 그 해 제1회 이상문학상의 대상은 김승옥에게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는 0장을 펴낸 후 37년동안 1장을 쓰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사견이지만 2014년 이상문학상은 왠지 김경욱이 받을거 같다는 느낌이 온다. 하지만 느낌은 항상 틀리기 마련이지.
제1회 대상작이 '서울의 달빛0장'인데, 여기에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다. 이어령 선생이 김승옥형을 호텔에 가둬두었다고 한다. 모든 숙식은 본인이 제공할테니 집필에만 몰두해달라고. 그렇게 해서 등장한 작품이 '서울의 달빛 0장'. 승옥이형이 말씀하시길 원래 소설의 제목은 '서울의 달빛'이었다고 한다. 그 소설의 서문의 의미에서 뒤에 0장이라 붙였다 한다. 그러나 이어령 선생은 그 다음의 이야기, 즉, 1장은 김승오겡게 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 그 소설의 소문조차 훌륭한 단편소설이라 생각하여 원 소설의 서문을 출간한다. 그리고 그 해 제1회 이상문학상의 대상은 김승옥에게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는 0장을 펴낸 후 37년동안 1장을 쓰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사견이지만 2014년 이상문학상은 왠지 김경욱이 받을거 같다는 느낌이 온다. 하지만 느낌은 항상 틀리기 마련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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