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30

지구에서의 우리 인간의 감소, 이는 과연 희망의 찬가인가?

 간만에 오지게 흥미롭게 읽은 책. <텅 빈 지구>


   경제학도이자 유통업에 종사하는 1인으로써 그 무엇보다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구에 관련된 경제학일 것이다. 인구의 증가와 관련되서 우려를 표현 것은 이전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의 아주 오래된 생각이었다(인구가 증가하면 토지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 곳에서 나오는 식량은 한정적이고, 이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빈곤과 가난의 빠지게 될 것이라고 예전부터 멜서스는 이야기했다). 오히려 인구 증가에 대한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닌, 인구의 감소가 지구 전반에 끼칠 막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새로운 시각의 책, <텅 빈 지구>에 관련되어 몇 자 적어보고자 한다.


  한국을 비롯한 여러 선진국들은 이미 출생률이 1.X의 시대로 접어든지 오래이다. 실질적으로 오랜 세월과 풍파를 겪은 세대는 아니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자식의 출생에 관련해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도 증가한 것이 사실이다. 농업이 주시대였던 과거, 그 시대에는 '자식의 수=경제력 내지 노동력'으로 평가되었던 것이 당시 사람들의 인식이었다. 사회가 고도화되고, 여성들의 교육기회 증가, 농업인구의 도시로의 이주현상 등이 발생하면서 자식의 수는 개인의 자식의 수는 그닥 중요하지 않은 요소로 전락하고만 것이 사실이다. 자식을 다수 출생하다보면 그로 인한 경제적 비용과 사회적 비용, 그리고 자신의 삶의 질에 투자할 수 있는 자발적 비용들이 자식을 위해 투자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로 인한 한 세대의 경제적 능력과 삶의 질은 향상될 수 있을 것이며, 전반적으로 사회로 확대해보았을 때, 사회적 환경비용의 감소, 더 나아가 개인들은 많은 땅들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지구라는 물리적 크기는 같은 데 인구가 감소하게 되니 당연한 이치 아니겠는가?, 하지만 해당 책은 인구의 감소가 우리 지구의 희망의 찬가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더욱 위험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 책은 엄청 위대한 학술서나 연구용 논문이 아니다. 독자들의 이해를 방해하지도 않는다. 다만 엄청난 사례와 인터뷰, 각국에서 현재 펼치고 있는 제도적 예시 및 실질적인 데이터 바탕을 통해 독자들의 이해를 도운다. 그리고 저자의 주장은 확고하고 명확하다. 인구의 감소는 실질적으로 창의성과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는 기회가 감소된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조금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생각의 파이값'이 작아지는 것이고, 이는 우리가 지금 껏 발전해왔던 것보다 더욱 더딘 발전 혹은 퇴보를 의미한다고 본다.   

  이에 따라서 실질적이고, 다각적인 현재의 정부의 출산장려 정책들이 과연 효과가 있는가? 책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결론적으로는 캐나다의 이민정책을 적극적으로 본보기 삼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이민자들에 대한 민족주의가 앞서는 것이 아닌, 다양성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캐나다는 다양한 역사적인 경험을 통하여 이민자들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현재에도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그 이민자들은 실질적으로 한 국가의 비용을 증대시키는 것이 아닌, 국가의 이익이 되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다양성의 인정, 그것은 너와 내가 다름, 너 자체로서의 인정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유대인 출신의 철학자 E.레비나스는 <시간과 타자>라는 저서에서 '타자성'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타자성이란, 단순히 차이나 다름이 아닌 주체에 의해서 환원될 수 없는 상대 개체의 고유한 속성이다. 타자성의 인정 그것이 한 나라의 경제적 부와 연관될 수 있을 것이다.그것이 한 나라의 미래를 바꿔놓을 수 있는 발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다양성의 인정의 시작이 더욱 새로운 강국을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난 다양한 창의성과 아이디어의 힘을 믿는다.

  그럼 20,000. 끝.

2019-02-17

찰리 채플린, 백남준 그리고 비빔밥



  지난 주, 백남준아트센터에 방문하여 전시를 보지 못한 까닭에 심기일전하여 2월 17일 일요일 그곳에 재방문하였다. 다행히도 전시는 진행중. 꾿.
백남준『미디어 'n' 미데아』展 19.02.16~20.02.20

  그의 작품들을 진실로 제대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과연 이 전시에서 미스터 백형님은 작품들을 통하여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이었을까.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전시실에 들어갔다. 총 17개의 작품 중 나의 사유가 나래가 펼쳐진 작품들이 몇 가지 있었으나 가장 감명 깊게 본 '<찰리 채플린> 2001년 作'에 대한 생각을 몇 글자 이곳에 흔적을 남기고 싶다.

<Charlie Chaplin>
2001, 4 CRT TVs, 4 radio's cases, 1 LCD moitor, 2 bulbs, 1 channel video, color, silent, 185x152x56 cm

  위의 사진이 그의 작품이다. 그림에서 보다시피 총 5대의 모니터에서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와 그의 모습들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그리고 손처럼 보이는 2개의 전구는 그의 영화에서 가스등을 연상시키는 구형 전구가 붙어있으며 이는 마치 흑백영화 시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찰리 채플린은 그의 영화 <황금광 시대>, <모던 타임즈>, <위대한 독재자> 등과 같은 영화에서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인간의 소외의 과정을 꾸준히 보여주었다. 그의 영화들에서 기계문명과 자본부의 사회의 도구로 전락한 인간의 모습은 순전히 하나의 부품의 역할로 등장한다. 그는 처절하게 이러한 역설의 미학을 통하여 물질만능주의와 기계화 시대에 '인간의 소외'. 즉 '인간성 상실'에 대한 모습을 나타낸다. 이는 엄연한 개인의 자율성 침해로 인식될 수 있으며, 크게 생각한다면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라는 이데올로기 내에서 벌어지는 엄연한 폭력이다. 개인의 자율적인 사고를 마비시킨 채 철저하게 사회적 부품으로 전락시키는 모습은 처참히기까지 하다.  
  이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등장하는 '빅브라더'의 모습과 아주 동일하다. '빅브라더'는 기술과 문명의 발달로 인해 철저하게 인간들을 감시하는 장치로 등장한다. 빅브라더의 감시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인간들의 개인의 자율성은 처참하게 파괴되고, 비판적인 사고 또한 마비시킨다.
  이와 관련해서 서구의 많은 철학자들은 그 폭력성에 대해서 고발을 하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진정으로 인간이 비판적 사고를 해야만 하는 많은 사상들이 뿜어져 나왔다. J.P.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그러하고 M.푸코의 권력담론이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의 미스터 백 형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기술과 인간은 충분히 조화를 이룰 수 있으며 인간이 지배가 되는 것이 아닌 그 문명으로 인해 인간의 생활은 더욱 윤택해질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 더불어 기술을 대하는 인간의 긍정적인 모습 그에 대한 찬가를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이러한 생각이 가장 잘 나타난 작품으로 꼽히는 <찰리 채플린>은 기존의 찰리 채플린에게 하는 하나의 답변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백남준의 작품들 속에는 끊임없는 조화와  정체성의 해체 등이 실질적인 주제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그가 서울, 도쿄, 쾰른, 뉴욕을 오가는 코스모폴리탄으로 삶 자체가 자신이 갖고 있는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러한 정체성을 해체하고 그것에 조화를 이루어 또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진정한 융화였던 것이다. 또한 동서양의 격식없는 동등한 시선에서의 만남, 음악과 예술의 조화, 모든 지구는 하나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각기의 문화와 삶의 형태는 다르지만 인간의 본질적인 존엄성은 동등하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것은 우리나라 전통의 음식인 '비빔밥'과 매우 닮아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의 융화, 음양오행의 진리가 비빔밥 속에는 담겨져 있으니까. 비빔밥 속에는 우주의 진리를 담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중심에는 우리의 삶이 있으니까. peace. 

ps. 아주 오랜만에 글을 쓰려하니, 처참하게 써지질 않는다. 다시 화이팅.

2019-02-10

반가워요! 미스터 PA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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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작연도 / 1963 작가 / 만프레드 몬테베 타입 / Photography Credit Line / 백남준아트센터. 사진:만프레드 몬테베



  유년시절 웅진 출판사에서 나온 월간잡지 '생각쟁이'에서 본 것이 그와의 첫 마주침이었다. 그 당시에 우리나라의 유명한 예술가 한 명으로 소개가 되었었다. 그와 관련된 글을 읽으면서 처음 느낀 것은 우리나라에 별 '희한한 사람'이 다있네라는 것이 어린 시절의 생각이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르고 30대로 접어든 지금 예술에 지대한 관심이 생긴 나는 문득 그에 대해서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그리고 오늘 용인에 백남준아트센터를 방문하였다. 하지만. 휴관. 다음 전시를 위해서 분주하게 준비하는 전시장에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책을 샀다. 그와의 두번째 마주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백남준. 우리나라가 나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비디오아티스트. 비디오아트라는 미술적 사조를 창조한 사람. 20세기에 기술의 총체적 집아라고 평가되는 텔레비전을 가지고 스스로의 예술적 사관과 철학을 철저하게 펼쳐나간 사람이다. 신기하다. 매일 보는 텔레비전이 하나의 미술의 표현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동양과 서양의 융화, 기계와 인간과의 관계맺음, 타자성의 이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진심어린 고찰, 그리고 그 속에서 뿜어나오는 역설적인 사고방식들.  그가 죽은지 10년은 훨씬 더 지났지만 그에 관한 자료들은 한 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한 사람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도구들이 필요하다. 그것이 철학적 자양분이든, 문화인류학적 세계관이든, 혹은 미학이든.

  사실 오늘 많은 사유를 하고 한 편의 글을 쓰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그에 대한 관심이 나에게 지대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조금 더 많은 생각과 성찰, 그에 대한 업적을 생각하고 스스로의 사유를 이곳에 다시 적도록 하겠다. 참으로 기묘한 생각이 들고, 아주 오랜만에 글을 쓰는 것이 그닥 쉽지않다고 다시금 느끼는 하루이다. 우선 그래도 오래간만에 만났으니, 반가워요 미스터 PAIK!

2017-10-09

실로 오랜만이다. 불나방.

나의 것조차 오랜만에 방문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관심이 없었던 터. 간만에 쓴 글들을 돌이켜 보니 한없이 그리고 정처없이 바쁘게 살았다는 생각이 가득하다.그리하여 임시공휴일이자 한글날인 오늘 나는 불속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활활 타오르기 위해 오늘도 출근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다시금 이 블로그에 나의 모든 것들을 적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2015-09-05

간만에 쓰는 일기

 마음의 장벽이 허물어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장벽의 높이는 더욱더 높아지는 것 같다. 삶의 녹록하지 않음을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살아가고 있는 이순간 눈앞에는 한없이 눈물이 맺혀온다. 그간 고단하지 않은 편한 삶을 살아온 나의 과오일까. 중요한 것은 오늘만큼은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싶었고 항상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역할을 도맡아 하고있는 나에게 따스하고 달콤한 말 한마디가 가장 큰 힘이었을 것이다. 예민해질대로 예민해진 지금 입을 가볍게 여는 순간 생명을 잃을 것 같은 자괴감에 빠진다. 모든이들이 알았으면 좋겠다는 단 하나의 명제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남자도 여자만큼 섬세할 수 있으며 혹자는 여자보다 더욱 섬세하다는 것이다.' 섬세했던 밤이 이렇게 지나간다. 내일의 태양은 다시 또 떠오르겠지. 꾿.나잍.

오래간만에 그냥 손이 가는대로 쳤다. 머릿속에 이물질이 침투한것 같다. 이물질의 이질감과 오늘은 꽤나 불편한 잠을 청해보련다. 안녕.


2015-07-08

whisper

장마가 오기 직전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한 여름의 무더움을 벗어나 잠쉬 쉬라는 듯이. 그 바람은 간드러지게 다가오며 나에게 속삭이며 말하는 기분이다.

어느덧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너의 잠자는 숨소리가 이제는 나를 포근하게 감싸주는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이불이 되었구나. 코고는 소리마저도 달달하게 느껴진다. 고맙다. 진실로.

어디로 떠나고 싶냐는 나의 질문에 너는 추운 시베리아로 가고싶다 했다. 그 추운 시베리아를 너는 그토록 왜 그리워하는 걸까. 마음의 무게를 이제 조금은 덜어놔. 추운 곳보다는 따스한게 좋잖아. love & peace.


영화 <이터널 선샤인>


 

2015-04-15

임철우 단편소설 「흔적」에 대한 작품해설 및 감상

‘죽음’에 대한 수용 그리고 마지막 ‘자유의지’의 발현
 
이 소설을 채택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인간의 삶의 근본적인 문제로 여겨지는 ‘죽음’에 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산자는 죽음에 대해서 논할 자격이 없다. 그들은 죽음을 경험해보지 못하였으니까. 죽음에 대해서 논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은 자만의 특권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인해 죽음에 대해서 추측만을 할 뿐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당신’이라는 노년의 인물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과 그것을 맞이하는 준비과정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죽음을 예감한 ‘당신’이, 그것에 대항하거나 반항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차근차근 마지막 순간을 준비하는 모습은, 노년의 생기를 잃은 모습이 쓸쓸하게 다가오지만 그것은 오히려 차분하게 독자의 마음에 안착한다. 사뭇 경건하기까지 하다.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이라고 인칭을 고집한 작가는 이것이 단순히 ‘당신’의 문제가 아닌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개개인이 언젠가는 직면하게 되는 자연의 섭리이자 삶의 커다란 문제라는 것을 인지시키기 위해서 사용한 장치일 것이다.
소설의 제목인 ‘흔적’의 사전 상의 의미는 어떤 현상이나 실체가 없어졌거나 지나간 뒤에 남은 자국이나 자취이다. 작가는 왜 이러한 제목을 붙였을까?
소설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다. ‘당신’이 자신의 죽음을 덤덤하게 준비하는 부분과 과거 회상 부분으로. 즉, 하루 동안 자신의 죽음을 덤덤하게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이 나타날 뿐이다. 회상에서 ‘당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죽음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이러하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그리고 아내. 이 순서는 단순히 시간적인 순서이지만 모두들 ‘죽음’의 형태를 맞이한 인물들로서 ‘당신’의 기억 속에 버젓하게 내재되어있다. 이것은 일종의 흔적이다. ‘당신’의 기억 속에 내재되어 있는 그들만의 온전한 흔적들이다. 그리고 죽음을 수용하고 있는 ‘당신’의 행동은 이러한 기억 속에 내재되어있는 흔적들조차 하나 둘 씩 지우는 행위로 묘사된다.
 
당신은 라이터와 신문지 몇 장을 찾아 들고 나온다. 마당에 붙은 텃밭 가장자리에 쪼그려 앉아 사진첩을 한 장씩 뜯어내기 시작한다. 종이가 두꺼워 쉽게 불이 붙지 않더니, 신문지를 집어넣자 금세 불꽃이 일어난다. 당신은 애써 사진 속의 얼굴들을 외면한 채 실눈을 뜨고 불길을 주시한다. 산간지역에선 가장 무서운 게 불이다. 민가에서 함부로 쓰레기를 태우지 못하도록 불 감시 차량들이 가을부터 봄까지 수시로 순찰을 돈다. 크기도 연대도 다른 수많은 사진들 중 아버지가 세상에 남긴 단 두 장뿐인 사진도 섞여 있다. 어머니, 아내, 아들, 친지들 그리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도 차례차례 재로 변하고 있다. 불현 듯 그것들이 당신의 육신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아니, 당신의 전 생애가 눈앞에서 송두리째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있는 것만 같다.(136쪽)
 
이것이 과거 기억의 흔적들, 즉 뇌리 속에 내재되어 있는 흔적들을 지우는 행위라면, 이를 제외한 부분, 즉 아침부터 밤까지 ‘당신’이 살아낸 마지막 온전한 하루의 기록을 간단히 나열하면 이렇다. 그 하루 동안 ‘당신’이 한 일이라야 잠을 깨어 간단한 아침을 먹고, 집 안에 남은 짐을 치우고, 뜻밖에 남아 있던 사진들을 태우고, 동물병원에 가서 병든 개를 안락사시키고, 집 근처로 돌아와 죽은 개를 묻고, 역으로 가서 열차표를 사고, 칼국수를 사 먹고, 친구에게 편지를 쓴 다음, 부산으로 가기위해 열차에 오른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어떠한 장애물 없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지만, 그것의 진행 속도는 무언가 차분하고 느릿하며 차근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10년 동안 살던 집에 남아 있는 자신의 모든 흔적들을 지울 수 있는 일들이 아주 수월하게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실질적은 흔적을 지우는 행위로서 기억의 흔적들을 지우는 일의 연장선상이다.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죽음에 대해서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닌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죽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이 두려움은 ‘당신’도 이미 느끼고 있다.
 
마지막 순간이 임박했음을 당신은 또렷이 예감하고 있었다. 길 위에서, 아니면 방 안에서. 어차피 당신이 죽음과 조우하는 형식은 그 둘 중 하나일 터였다. 그러나 무심히 걷거나 불시에 길바닥에 쓰러져 개처럼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끔직한 악취와 함께 부패한 시신으로 뒤늦게 발견되는 것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당신 몫의 육신, 그것은 바로 당신 자신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육신을 추악하고 끔찍한 오물 덩어리로 만들어 비정한 타인들의 조롱과 구역질과 가래침을 뒤집어쓰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당신에겐 그 외의 선택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신은 철저히 혼자였다. 이제 당신을 두렵게 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떻게 죽어야 이 초라한 흔적을 지상에 남기지 않을 것인가.(148족)
 
그리하여 작가가 ‘당신’으로 하여금 꿈꾸게 한 것은 하나의 완벽한 소멸이다. 다음 생에서는 잠시 피었다가 사라지는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가 되고 싶다는 그의 마지막 말처럼, 그는 모든 흔적을 지운다. 조촐하게 지내던 거처와 주변을 정리하는 그의 모습은 죽음이 아니라 실종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죽었다는 흔적조차 없게 만드는, 그럼으로써 비로소 이 세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고 싶어 하는 그의 노력 애처롭게 마저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소멸을 넘어서 필자가 더욱 흥미롭게 여겼던 것은 죽음의 방법을 스스로 택한 ‘당신’의 모습이다.
 
바다로 가자, 라고 당신이 결심을 굳힌 것은 두 달 전이었다. …(중 략)… 아아아아아. 울음소리였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사람인지 짐승인지조차도 모호한 그 통곡 소리가 천지를 가득하게 채우며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꿈에서 깨어난 당신은 까닭 모를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밤새도록 당신은 어둠 속에 웅크려 앉아서 그 울음소리에 대해서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보니, 어쩌면 그것의 정체를 알 것도 같았다. 그랬다. 그 울음은 목숨을 가진 지상의 모든 것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그 순간 당신의 뇌리에 뉴스 속 노부부의 모습이 떠올랐다. 당신은 그들이 다시 떠오르지 않기를 바랐다. 바다 밑 깜깜한 심연으로 영원히 가라앉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그리고 새벽 동이 희미하게 터올 무렵, 당신은 그동안 고민해왔던 해답을 마침내 찾았다.(150쪽)
 
위의 구절에서 나타나듯 ‘당신’은 스스로 죽음의 방법에 대해서 선택하고 있다. 바다라는 장소를 선택한 것도, 그리고 그동안 고민해왔던 해답을 마침내 찾은 것도 죽음을 맞이하고 흔적을 지우려는 자 ‘당신’이 홀로 ‘자유의지’에 의거하여 정한 것이다. 이는 스스로가 소멸을 하려는 준비인 동시에 마지막까지 인간으로서의 자유의지를 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마지막까지 정력을 다하여 스스로가 죽음의 방법을 택하고 자신의 의지가 가는대로 선택하였다는 것은 곧 인간은 결국 흔적을 남기기 위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단말마의 비명과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즉 몹시 고통스러운 상태를 맞이하지만(죽음) 비명을 지르는 행위(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하다. 이 소설은 죽음을 맞이하는 ‘당신’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두 가지의 형태의 흔적에 대한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숙명론적으로 받아들여야하는 죽음이라는 거대한 자연의 섭리 앞에서는 자신의 기억과 일상에서의 모든 흔적들을 지운다. 오히려 자연으로 돌아감으로써 홀연히 인간은 자연의 일부가 되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죽음의 방법에 대해서는 인간이 스스로 택하게 된다. 이는 일종의 인간이 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자신이 추구하고자하는 것에 대해서 비록 그것이 죽음 앞일지라도 그 방법에 대해서는 택할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세상에 어떠한 모습과 형태로서라도 자신의 존재를 조금이나마 알리고자 하는 즉,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연의 욕망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죽음이 ‘무(無)’라면 인간의지의 발현은 ‘유(有)’라 할 수 있다. 결국은 이것은 반대에 있는 것이 아닌 하나의 선상에 있는 것이다. 대자연의 섭리에 적응하며 사는 것이 인간이며, 그러한 인간을 다시 받아주는 곳은 대자연 밖에 없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 두 상황을 공통적으로 맞이할 수 있는 것은 ‘흔적’이라는 두 음절의 단어라는 것과 인간은 늙고 병들고 마련이기 때문에 죽음은 때때로 구원일 수도 있는 것, 즉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닐까.



 
 
 
 
 
 
 
 
 
 
 
 
 
 
 
 
 
 
 
 
 
 
 
 
 
 

2015-02-07

타인의 자유를 억업하는 자, 과연 그들의 자유로운 행위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

  중동의 요르단이 자국의 파일럿을 IS에 의해서 잃었다. 영예로운 파일럿을 잃은 그 보복으로 현재 IS를 전멸하고자 공습을 시작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르단이 IS를 향해 공습을 전개했다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다. 본질적으로 생각해보아야할 것은 과연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자, 과연 그들의 자유로운 행위도 정당화될 수 있는 가?'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사회는 존재하고, 사회가 존재하는 한 대화는 필수적이다.'라는 유명한 문구가 있다. 이는 칼 포퍼라는 철학자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저서에 적은 마지막 문구이다. 그렇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인간이며, 따라서 사회는 존재하고, 결국은 대화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IS의 무자비한 행동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 논리대로라면 대화가 통하지 않고, 따러서 그들에게는 사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만이 존재하는 것이며, 결국은 인간이 아니다. 그렇다. 그들은 동물이다.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며 무자비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정당화시키는 행위야말로 반인륜적이며 도저히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행위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들의 폭력성 또한 정당화 될 수 있는가? 절대적으로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이미 그들은 타인의 자유를 앗아갔다. 이것이 바로 폭력이다. 폭력의 형태는 눈에 보이는 직접적 폭력과 눈에 보이지 않는 간접적 폭력으로 구분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참수영상을 본다면 지극히 물리적 폭력을 가한다. 이것은 가장 악랄한 방법이며 그 폭력의 행위는 절대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다. 이미 타인의 자유를 앗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의 폭력이고 폭력은 어떠한 형태가 되었던 정당화 될 수 없으며, 그 형태가 물리적인 형태로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는 것이라면 더욱더 비극적이다.

  지금 현재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정말 최악이다. 진실로 최악 중 최악이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반인륜적 행위가 이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다. 끔찍한 현실이다. 휴머니즘은 그들에게 이미 저속한 서양의 사상으로 낙인된 것인가? 휴머니즘을 학문적으로 구체화한 서구의 사상도 실소를 자아내지만, 그 실소를 넘어서 인간에게 절망감을 안겨주는 행위가 바로 현재의 IS인 것이다.

ps. 그냥 주저리주저리, 손가는대로 생각이 가는대로 적었다. 참. 말이 안나온다.





2014-11-22

언젠가 다시 한번 - 최승자



* 언젠가 다시 한번 - 최승자

언젠가 다시 한번
너를 만나러 가마.
언젠가 다시 한번
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우리가 지나쳐온,
아직도 어느 갈피에선가
흔들리고 있을 아득한 그 거리들.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그러나 나는 다만 들이키고 들이키는
흉내를 내었을 뿐이다.
그 치욕의 잔
끝없는 나날
죽음 앞에서
한 발 앞으로
한 발 뒤로
끝없는 그 삶의 무도를
다만 흉내내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너를 피해
달아나고 달아나는
흉내를 내고 있다.
어디에도 없는 너를 피해

언젠가 다시 한번
너를 만나러 가마
언젠가 다시 한번
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이 세계의
어느 낯선 모퉁이에서
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 스스로의 마음을 이제껏 양육시켰던 오늘날, 형형색색의 낙엽은 정처없이 날려가는구나.  바스락거리는 낙엽처럼 이미 마음의 자양분이 없어진듯하다. 매몰차게 다가올 겨울바람은 나의 자양분을 더욱 앗아갈 것이며, 아직 이르기는 하지만 따스한 봄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난, 한없이 어리고 어린 홀로 선 존재가 되었다. 


- 그냥 이 시를 읽고 싶었고, 이러한 글을 쓰고 싶었3. 





너의 모습을 처음 봤을때 
사랑이라고 느끼고 싶었지 
하지만 너는 내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아 
난 화가 났었지

지금까지 이런 기분은 
처음인것만 같아 
어느 곳 어느 자리에 시선을 모아도
보이는건 너의 모습뿐 
다른건 관심 없어 
하지만 나의 마음을 네게 보이긴 정말 싫어 

너와 함께 할수 있다면 
그 어떤 슬픔조차 
나는 감당할수 있을것 같은데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엔 
넌 내게 너무나도 멀리 있는것 같아

그 어떤 사랑도 난 원치 않았지 
이별을 견뎌낼 자신이 없기에 
하지만 이렇게 니가 내 마음을
장악할지는 예상도 못했지

지금까지 이런 기분은 
처음인것만 같아 
어느 곳 어느 자리에 시선을 모아도
보이는건 너의 모습뿐 
다른건 관심 없어 
하지만 나의 마음을 네게 보이긴 정말 싫어 

너와 함께 할수 있다면 
그 어떤 슬픔조차 
나는 감당할수 있을것 같은데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엔 
넌 내게 너무나도 멀리 있는것 같아

너와 함께 할수 있다면 
그 어떤 슬픔조차 
나는 감당할수 있을것 같은데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엔 
넌 내게 너무나도 멀리 있는것 같아

2014-10-03

형님의 신보 소식.




프린스 형님의 신보가 나왔다.
그의 백밴드 3rd eyed girl과 함께. 앨범커버가 무엇보다 초현실주의 느낌이라 더 매력적.
06년에 앨범 내신 이후에 꽤나 간지곡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있다! 와우!

Art Official Age track list:
1. "Art Official Cage"
2. "Clouds"
3. "Breakdown"
4. "The Gold Standard"
5. "U Know"
6. "Breakfast Can Wait"
7. "This Could Be Us"
8. "What It Feels Like"
9. "Affirmation I & II"
10. "Way Back Home"
11. "Funknroll"
12. "Time"
13. "Affirmation III"
Plectrumelectrum track list:
1. "Wow"
2. "Pretzelbodylogic"
3. "Aintturninround"
4. "Plectrumelectrum"
5. "Whitecaps"
6. "Fixurlifeup"
7. "Boytrouble"
8. "Stopthistrain"
9. "Anotherlove"
10. "Tictactoe"
11. "Marz"
12. "Funknroll"


2014-09-01

스스로의 부족한 깨달음.

 작년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다시 찾지 않을 줄 알았던 성당에 스스로 발길을 돌렸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것은 아무도 모르겠지만. 문득 가고나서 보니 어린이 미사. 굳.
어린이 미사에 참여한건 내가 10살때. 사실 그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기억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닥 독실한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인간의 본성상 의지할 것은 신뿐이더라. 나의 족적을 끊은지 16년만에 찾았던 그 어린이 미사는 각종 깨달음을 나에게 전해준 터. 최악의 2014년 여름을 맞이하고 겪어왔던 나에게는 하나의 각성제가 되었을까. 어린이들의 목소리들이. 그곳에 울려퍼지는 사운드조차 16년째 동일하여 저절로 뱉어진 나의 순수함이였을까. 변한 것은 나의 키 뿐. 뭐 쁠러스하자면 빠진 젖살 정도?
꽤나 흥미로웠다. 단 한시간이지만 말이다. 이런 적은 없었다. 한 계절을 되돌아 본다는 것이. 그래도 그게 뭐가 되었건 스스로 특별했던 여름이였으니까. 하하.


1. 어른들은 유년시절에 대해서 스스로 기억하고 있지만 이미 어른이 된 이상 그들의 잣대로 어린이들을 구속한다. 마치 자신의 유년시절은 원래 없던 것처럼 말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어 본 사람은 느낄 것이다. 이 세상에 어린이가 '짱'이라는 것을. 여전히 시대가 지나가고 세월이 지나감에도 누군가에 대한 구속력은 현존한다. 더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없게 말이다. 희망의 빛이여. 시발.

2. 누군가 '영원'하자고 약속하는 것, 혹은 관계를 '운명'이라고 규정짓는 것을 보면 그것은 허황된 것이다. '영원'과 '운명'은 신이 그 권리를 갖고 있으며 그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자는 신의 선택만을 받은 자일 뿐이다. 인간의 잣대로 '운명'과 '영원'을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권리를 부여받고자 발버둥 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의지로 그 열망을 표출하고자 꽤나 멋지고 매혹적인 단어를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영원'과 '운명'은 이 세상에 없다. 그것은 단지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질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노력'은 단순히 열심히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말그대로 '힘쓸 노'의 '힘 력'의 의미이다.  인간이 갖고있는 '힘'의 표출인 것이다. 힘을 표출했는가? 적절하게 신의 권리를 부여받기 위해 발버둥 친 것에 불과하다.  아직도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것이 신의 영역이며, 그 어느누구도 어떠한 정도가 신의 권리를 부여받을 수 있는 지에 대해서 모른다. 이 세상의 누구도 '영원'과 '운명'을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에. 또한 '신'이라는 단어 또한 그에 버금가는 멋진 단어이다. 시발.

3. 모든 슬픔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적절한 역치값이 필요하다. 그것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며 그 역치값이 상당히 낮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좌절하고 절망한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경험력의 부족이며, 일례로 '이별'이라는 두 단어에 힘들어하는가? 결론적으로 그것은 '이별'을 경험한 자의 부질없는 찌질함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아름다운 미사여구정도로는 괜찮겠다. 그 누구보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감정의 노예가 된 것, 그 기간의 정도는 개인의 경험의 차이지만, 이러한 것조차 스스로의 역치값을 높여가는 일환이다. 자기합리화가 꽤나 멋진 단어라고 방금 든 생각이다. 시발.

4. 옛 연인에서 다시금 친구로, 꽤나 섹시한 관계라고 이야기한다. 연인보다 더욱더 섹시한 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감정적으로는 스스로의 부족함과 기껏 좆도 아닌 이기심이 그 길을 막는 것 같지만, 더욱더 생산적이고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허황된 자신감속에서 실질적인 관계를 유지해보기로 결론지었다. 연인에 있어서는 감정을 같이 공유한 관계이지만, 그 관계를 벗어나 오히려 '노력'의 일환으로 진솔한 대화를 더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 누구보다 강력하게 맺어진 '추억'의 끈을 놓치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세상(?)이 만든 암울한 장벽을 향해 함께 망치질 할 수 있는 진정한 관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섹시한 관계를 맺어본 적이 전연 있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한 번즈음은 필요하다고 느낀다. 단 한 번만. 정확히 딱 한 번만. 말이다.
  일찍이 프랑스의 철학자 조르주 바티유는 에로티시즘을 일러, '불연속적인 인간의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의 한 형태'라고 말했으니까. 탯줄로 연결되어 있던 모태로부터 분리되어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인간의 삶이란 불연속성을 경험해 가는 도저한 연속의 과정이며, 모태로부터의 이탈이라는 불연속적인 경험을 통해 불가해한 세계 속에 발을 디딘 인간은, 그물처럼 촘촘히 얽혀있는 관계성을 통해 개체와 개체사이의 불연속성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니까. 그 종말에는 불연속적인 그리고 일회성만의 죽음이 남는 거니까.
   괜찮은 섹시한 관계이며 에로티시즘의 발현이라고 해도 괜찮겠다. 시발.




한 시간동안 머릿 속에 정리한 것 끝. 오늘도 무사히. 무진장 글을 읽고 혹은 글을 쓰고 싶었던 새벽.








2014-08-13

소원

달이
그 어느때보다.
물보다도 더 맑게 빛났고, 불보다도 더 환하게 빛났다.
비온 뒤 청명한 하늘
스산한 공기가 몸을 감쌌다. 여름이 잊혀진지는 오래인듯.
달을 바라보며, 유일하게, 순수하고, 정갈한 마음으로 그리고 간절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소원을 비는 것 뿐이다.

그렇다. 소원을 비는 것 뿐이다. 

'언젠가는 정말 언젠가는......'

꽤나 아름다운 밤이다. 적어도 오늘은 소원을 빌었으니 말이다.






2014-08-07

24시간이 모자라

바쁘게 사니 잡생각은 안드는데 너무 할게 많아서.
잠까지 줄여가며서 생산적으로 사는 것이 좋은데.
잠이. 쉽게 줄지가 않는다.


2014-08-02

칠월 칠석





달력보니 오늘이 칠월 칠석이네.
견우와 직녀가 일 년에 단 한번 만나는 그 날.
서로 은하수에 가려져 만나지 못하던 그들은
오늘만을 서로 기다렸다네.

2014-07-31

《청춘》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현존하는 시인 중에 작고를 한 양반들을 제외하고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단연 심보선. 왠지 모를 여러가지의  찌질함을 구구절절하게 써나가는 것이 그의 시만의 매력일 것이다.
가장 중요한 모토는 그의 시에 있어서 '사랑'이라는 이 두 글자인데. 단연 이 '청춘'이라고 씌어진 시에서도 어김없이 사랑에 대한 시인의 생각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어김없이 올해도 태풍은 다가온다. 그리고 이제 주룩주룩 비를 내리기 시작하기 이전에 나는 창밖의 무지개를 보았다. 그 무지개는 지상에 있는 자를 하늘로 데려다 주는 다리임이 틀림없다. 밑바닥에 깔려있는 이 모든 것들이 진정한 이상향으로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진정으로 열망하는 것이 또한 '청춘'아닌가. 쓰디쓴 죄악들을 깨끗이 씻어버릴 면죄부가 있다면 나는 필연코 내 '청춘'을 팔아서라도 그것을 찾기 위해 나의 모든 정력들을 쏟을 것이다.




 

2014-07-29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Dawn of the Planet of the Apes, 2014)

 (스포가 있으니 다소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올 여름 나의 발걸음과는 무관할 것으로 생각되던 극장가. 그러나 방학도 했고, 7월 달에 목표한 것은 다 이루었으니, 스스로에게 선물을 하나 해줄 터. 간만에 극장을 방문했다. 꽤나 좋더군. 오랜만에 가니. 극장에 다녀온 친구들이 '혹성탈출 이번에 나온게 대박이다.', 혹은 '별로다.'라는 반응을 뒤로한 채, 우선 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오리지날의 간지가 있으니까. 비록 리메이크작 1편을 보지 못하였지만 말이다.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시저(앤디 서키즈 분)의 눈동자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여러가지의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그것은 휴머니즘, 평화, 인간의 무한한 욕심과 생존하고자 하는 의지력, 야생에 대한 두려움 등.  크게 유인원들에 대한 생각, 인간에 대한 생각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 두 영역들을 함께 고찰한 생각들을  나열할 것이다.


  유인원들은 이미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고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는 사회적 룰에 적응하면서 살아간다. 그들의 리더는 시저. 야생의 왕국에서 그렇듯 힘이 가장 센 자의 말을 듣는 것이 이 곳의 법칙이다. 모든 유인원들은 시저의 말에 순응하며 지낸다. 어떠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가 반드시 필요한데 그것의 기초는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라는 그들만의 위대한 명분이다. 그리고 그것에 맞게 시저는 그들의 무리를 효과적으로 잘 운영한다. 그러나 사회에는 항상 반동분자가 존재하기 마련. 이는 코바(토비 켑벨 분)로 나타나진다. 시저는 인간에 대한 애정, 즉 휴머니즘의 감정과 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한 명분을 적절히 내세우고 인간과 유인원들의 평화를 지키고자 하는 사나이지만, 코바의 마음 속에 남아있는 것은 철저한 인간들에 대한 증오심이다. 결국 코바는 리더인 시저를 총으로 저격하고, 인간들이 시저를 죽였다는 새로운 명분을 내세운다(그들의 세계에서 리더가 사살당했다는 새로운 명분만큼 사회적 동요를 일으키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니까). 그리고 코바를 중심으로 하여 인간들의 세계를 정복하러 나선다. 결국 이 유인원 내부에서도 현재의 인간들이 갖고 있는 감정들을 그대로 나타난다. 오히려 그들은 페르소나를 모두 벗어던진 채 야생 본연의 감정을 서슴없이 나타낸다. 그것은 가장 진솔한 감정의 표출이다. 또한 어떠한 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철저한 명분이 필요하며 그 명분을 위해서는 희생양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보여준다(시저는 코바를 반동분자로 인식하면서도 다른 유인원들, 즉 대중의 앞에서 그를 직접적으로 죽이지 않지만, 코바는 새로운 명분을 위해서 시저를 총으로 쏘고 그것으로 인해 대중들의 동요를 이끌어낸다).


  바이러스 후 10년, 소수의 인간들만이 살아가는 인간의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이 삶을 영원히 영위하기는 너무나 어려운터. 전기공급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서 그들에게 전기를 공급받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유인원 도시에 있는 댐(인간 욕망의 물체)을 가동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우연치 않게 유인원의 도시로 접근한다.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전기를 공급받기 위해서. 그리고 가장 강인한 인간의 의지를 보여주는 사나이 말콤(제이슨 클락 분)은 그들의 리더 시저와의 협상을 하기 위해 유인원의 도시로 들어간다. 그리고 말콤은 시저와의 협상을 통해 유인원의 영역에서 댐을 가동시키기 위해 며칠간 머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결국 댐을 가동시키는데 성공한다. 인간의 강인한 자의지가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뛰어난 진보를 이룩한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들은 퇴보를 하는 방법을 절대적으로 잊어버렸다. 즉, 그들이 필요에 의해서, 좋은 사회를 영위하기 위해서 신진 문물들을 발달시켰지만, 이제는 그것이 없으면 절대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결국 그 이전의 단계 즉, 전기가 없어도 영위할 수 있는 생활의 방식은 그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지 오래이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유인원들의 모습은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의 모습과 그 구성원들의 모습을 그대로 대변한다. 이데올로기의 적합성과 그것을 유지시키기 위한 명분, 또한 휴머니즘의 실현과 평화에 대한 열망. 이 중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 지는 여전히 논란거리이다. 유인원들의 모습이 오히려 현존하는 인간들의 모습보다 더욱 솔직하게 표현되었다. 인간의 모습과 야생의 모습을 적절하게 잘 믹스시켜놓은 듯하다. 또한 인간에게 있어서 지나친 기술 진보는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킴을 우리에게 각성시킨다. 이는 추후 인간의 의지로 인해 발달한 기술들로 인하여 인간 스스로가 자멸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메시지들은 여전히 인간중심주의에 머물고 있으며, 인간의 잣대로 모든 것을 평가한 것이다. 분명히 이 시리즈 마지막 편에는 분명히 인간이 승리할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의 의지와 무한한 가능성을, 자멸하는 인간이 아닌 절대적인 인간을 형상화하는 것이 미국발 상업영화의 최종 목적일테니까.



- 개인적인 서사력 자체가 전체적으로 기술력이 뛰어난 CG에 미치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것은 단순함의 문제가 아니라 뻔함의 문제이며, 서사력 자체가 좀 더 악질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남아있다.

- 오리지날 자체가 5편까지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2011년부터 리메이크된 이 작품 또한 5편까지 나올 것을 예상되는바. 스타워즈 시리즈에 이은 새로운 SF 리메이크 작에 대한 기대감을 조금이나마 갖고있다.

2014-06-22

사랑 추억만큼...

진실로 스스로 생각하기에 퍽 멋진 연애는 아니였으나, 
값진 연애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기억은 스며들지만 추억은 가장 진하게 남는 법. 
그 추억들을 잊을 수 있을까. 
앞으로 삶을 살아가면서 말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설레였다. 
고마웠다. 이제는 잠시 쉬려한다. 땡큐. 
항상 신의축복이 함께하길. 그리고. 건강해!






2014-05-18

<아Q정전>과 허세 이데올로기에 대한 생각

루쉰
<아Q정전>


  중국의 대문호 루쉰이 1921년에 발표한 단편소설로써 이 작품은 중국 한문학의 전통적 장르인 전(傳) 형식을 변형시켜 신해혁명이 일어나던 무렵의 중국 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아Q는 서구 열강의 침략 앞에 속수무책으로 남아 있던 중국인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Q는 30여 년의 생애를 통해 온갖 세상 풍파를 겪었으면서도 마지막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까지 자신의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지 않고 근거 없는 우월감이나 자기 비하로 일관함으로써 생애를 비참하게 마감한다. 그는 건달의 행패에 대해서 상황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아닌 ‘노려보기’라는 수법과 ‘정신적 승리’법을 통해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합리화 시킨다. 남에게 모욕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아Q는 상대를 평가해보고 어눌한 자 같으면 욕을 했고 힘이 약한 자 같으면 때렸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아Q가 손해를 보는 때가 많았다. 그래서 그는 차츰 방침을 바꾸어 대개는 화난 눈으로 노려보기로 했다.”
  하지만, 아Q가 이렇게 노려보기 주의(主義)를 채택한 후에 웨이주앙[미장(未莊)]의 건달들은 더욱더 그를 놀려대었고, “마침내는 때리기까지 했다. 아Q는 형식상으로 패배했다. 건달들은 그제야 만족해하며 의기양양하게 돌아갔다. 아Q는 잠시 선 채로, “나는 자식에게 맞은 셈 치자. 요즘 세상은 정말 개판이야…….”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나서는 그도 만족하며 의기양양하게 돌아갔다.”라는 일종의 정신 승리법을 통해 스스로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이는 자신의 상황을 이성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채 스스로가 자위행위와 더불어 자만감에 빠진 중국인들이 모습이 곧 아Q인 것이다. 중국은 과거 세계의 중심으로 자부하며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지닌 나라였다. 그러나 당시 청나라의 쇠퇴와 외세들의 침입 그리고 중국내부의 혁명으로 인해 자멸해가고 피폐해져 있는 상태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중국인들은 여전히 예전의 명성만을 운운하며 새로운 변혁의 시대를 정상적으로 인지하지 못한 채 머물러있었다. 이로 인해, 스스로 정체성의 혼란을 일으키게 되며 그들은 더욱더 자신들의 자위행위를 확고하게 정당화 시킨다. 이러한 점에서 당시의 중국인들과 아Q를 동일시할 수 있다. 이는 당시 반식민지가 되어 있던 중국의 사회적 상태에 대한 준렬한 비판이다. 민족적 위기 속에서도 근거 없는 우월 의식, 즉, 끊임없이 놀리거나 맞으면서도 자기를 경멸하면서 위기를 벗어나고자 하는 자존심, 자신보다 약한 상대에게 힘을 과시하는 비열함, 여기저기 붙어 다니며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는 기회주의적 태도는 당시 중국인들에게 만연해 있는 자세에 대하여 루쉰은 일침을 가한 것이다.
 
  당시 중국인들이 가졌던 생각은 비단, 당시의 중국으로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된다. 소위 ‘아무것도 없으면서 허세’를 부리는 태도, 즉 ‘허세 이데올로기’를 우리는 쉽게 관찰할 수 있다. 허세란 ‘실속없이 겉으로만 드러 보이는 기세’를 의미한다. 그 일례로 ‘없어도 있는 척’, 현실과 다른 실제의 삶이 만연해 있는 현실이 그러하다. 아무리 중고차라도 좋은 차를 타야 좋은 대우를 받고 아이들도 유행에 따른 옷과 학원 등의 소비를 해야 인정받고 무리에 낄 수 있다. 이는 타인의 시선에만 신경을 쓰고 스스로의 사고와 내실을 상실한 채, 상호의존성을 중요시여기는 대한민국 사회의 또 다른 병폐이다. 또한 보통의 나이가 많으신 어르신들의 말투에는 자연스레 ‘이것들아~ 우리 때에는 말이야’ 혹은 ‘내가 왕년에~’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물론 그들의 말에는 과거 추억에 대한 회상의 역할을 하고 어린 학생들에게 지혜와 지식을 전달해주기 위한 차원이지만 그 이면의 무의식 속에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 타성에 젖어있는 모습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국민들의 인식 속에서도 일종의 허세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나 인물에 대하여 본질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 그것에 대한 껍질, 단순히 대중매체에서 등장하는 유행, 혹은 또래집단에 만연해 있는 현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인 것이다. 이는 개인의 비판적 사고를 마비시킨다는 점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다.
  과거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고 물리적 폭력을 정당화하였던 시절이 있었다. 이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즘(Nazism) 혹은 파시즘(Fascism)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물리적 폭력을 동반한 명분의 허구성은 고통을 통해 쉽게 인지된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은 쉽게 인지되지 않는다. 루쉰이 비판하고자 했던 당시의 중국인들은 그 사회에 만연해 있는 생각, 즉, 쇠퇴해가고 있는 중국이 아닌, 찬란했던 시절의 중국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허세를 정당화시키는 이데올로기 폭력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과거 독일의 나치즘의 물리적 폭력의 희생양이 되었던 유태인들 혹은 사회를 뒤덮고 있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잃어버린 당시의 중국인들, 이것은 형태만 다를 뿐 엄연한 폭력이다.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희생양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이미 윤리적인 정당성을 상실한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긴요한 것은 그들의 정신을 개조하는 일이다. 그리고 정신 개조를 잘 이룩할 수 있는 길은 문예다”라고 말한 작가의 말처럼 루쉰은 진정으로 당시의 중국 국민들이 갖고 있던 허세 이데올로기의 폭력으로부터 자국민을 진정으로 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Q로 형상화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비가시적인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촉구한 것이다.
  현대 사회의 만연해 있는 여러 형태의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비판적 의식을 마비시키고 타율적 존재로 전락시킨다는 점에서 분명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다. U. 에코가 《대중의 영웅》에서 지적한 것처럼 사소한 일상생활의 영역이라도 정치화하고 탈자연화하는 의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다양하게 분산되고 은폐되어 있는 현대적 이데올로기의 특성을 고려할 때 저항보다 우선적인 것은 인식이다. 구속에 대한 인식없는 자유에의 욕망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영화 《메트릭스》의 교훈은 그 어느 때보다 현실적이다 : “진정 메트릭스를 벗어나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이 메트릭스 안에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