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07

형도횽아♥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얽눌을 한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를 흘러넘쳤다
택시 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떄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저 극장에서 어떤 시인이 심야 상영을 보다가 죽었다면서요?」
「그 시인 이름이 뭐더라. 기, 기형, 기형도라 했지. 시집이 베스트에 오르고 해서 뭔가 하고 지난 여름에 사보기도 했지. 제목부터가 죽음을 연상시키는 것이더군.≪입속의 검은 잎≫」
「나도 사볼까 했는데 제목이 너무 섬뜩해서 사지는 않고 서점에서 <입속의 검은 잎>이라는 시만 몰래 훔쳐보았죠. 6·10 항쟁 전후한 장례식, 그러니까 이한열 장례식 같은 것을 묘사한 시이던데 다른 구절들은 기억이 안나고 마지막 구절은 지금도 기억나요.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수혜가 읊조리는 그 구절에 대한 기억이 나의 뇌리에서도 새삼 떠올라왔다.
「그래, 그 구절 나도 생각나. 그 시를 읽으면서 입 속에 매달린 검은 잎이 무얼까 생각해보았지.」
「나도 생각해보았는데요, 입 속에 잎처럼 매달려 있는 것이라곤 혀 밖에 없잖아요. 그래 나는 혀라고 생각했죠. 금은 혀니까 타버린 혀, 불의 앞에서도 침묵할 수밖에 없는 혀가 되는 거죠. 그건 이한열 같은 투사들의 혀와 대조되는 것이죠. 어때요, 내 해석?」
「침묵의 혀, 타버린 혀로 해석하는 걸로 보니 수혜도 꽤 시를 볼줄 아는 것 같은데, 그 시에서도,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 운운한 구절이 나오지. 그러니까 침묵의 혀는 하인의 혀라고도 할 수 있지. 그리고 그 시에서 검은 잎이라는 말이 세 번 나오고 있는데, 한번은 책과 연결되어 이쏙 또 한번은 백색의 장례 차량과 연결되어 있고 마지막 한번은 입과 연결되어 있지. 첫 번째는 그것이 무엇을 지시하는지 파악하기가 힘들지만 아마도 광주사태와 같은 구조적인 폭력 앞에서 휴지처럼 무기력한 책갈피들을 의미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이렇게보면 여기서도 침묵의 이미지와 연관이 있지. 두 번째는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고 했으니 검은 만장(輓章)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여기서는 침묵의 이미지와 함께 죽음의 이미지까지 포함하고 있는 거지.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입 속의 검은 잎 역시침묵의 혀인 동시에 죽음의 혀라고 할 수 있지. 입속에 검은 만장처럼 쳐져 있는 혀. 그 상태를, 악착같이 매달린 것으로 표현했으니 검은 잎은 일종의 거머리같은 세력으로 볼 수 있지. 삶 속으로 악착같이 파고드는 죽음의 세력. 우리가 불의한 폭력 앞에서 침묵하는 이유도 그 죽음의 세력 때문이지. 우리가 두려운 것은 죽음 자체라기보다 죽음으로 인하여 비굴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삶의 온갖 양태인 것이지. 그것을 시인도 두려워하고 있는 거지. 내 잎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참으로 어두운 이야기군요.」
「그 시인의 시들은 결국 입 속의 검은 잎으로 부른 검은 노래들이라고 할 수 있지. 대부분 어둡고 절망적이지.」
거대한 절망의 덩어리처럼 어둠 속에서 있는 파고다 극장을 지나, 차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도로를 건넜다. 이미 하룻밤 숙박비를 지불한 그 여관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굽어도는 골목 골목에는 검은 만장들이 가득 깔려 있었다. 하늘에는 검은 만장들이 차일처럼 펼쳐져 펄럭거렸다. 우리는 그 길과 하늘을, 방금 밝혀진 조그만 사랑의 등불 하나로 비추며 걸어나갔다.

                                                                       - 조성기 소설 ‘존재하려는 경향에 대하여’中 에서 -



뽕2를 보시다 피카리디에서 훅 가신 우리 형. 

2014-02-05

'아침의 문'(박민규)와 '포르트 리가트의 성모'(살바도르 달리)에 관한 고찰




  날이 많이 추워졌다. 요즈음 자기 전에 책을 보지 않는다. 나또한 점점 스마트폰의 현란한 손맛에 적응을 해가는 터. 참 개탄스럽다. 간만에 짤막한 단편이나 읽어야지 하고 서스럼없이 책장에 손이 향한다. 단연 이상문학상에 손이 먼저가는 것 우선일터, 매년 초(약 1월 중순즈음)에 이상문학상이 발표가 되는데, 스스로가 새로운 이상문학상수상작품집을 맞이하는 자세는 전년도의 책이 아닌 5년전의 이상문학상수상작품집을 읽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날 밤 저녁에 집어든 2010 년제 34회 이상문학상수상작품집. 대상 박민규 '아침의 문'.

  문을 열고 나오려는 자와 문을 열고 나가려는 자의 대면, 태어나는 순간과 죽어가는 순간의 극적인 만남. 박민규의 단편소설 '아침의 문'의 후반부를 간단히 이야기한다면 이러할 것이다.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이 책의 전개가 어떠하고 어떠한 내용을 담고있고 무엇에 대하여 이야기하는지 그닥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읽어봐라. 그리고 느껴라. 그냥 나는 스스로의 느낀 점을 말하고 싶으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탄생, 생성 혹은 제조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 세상에서 언젠가는 지극히 언젠가는 사라지기 마련이다. 인간 또한 그렇다. 누군가가 태어나는 자가 있으면 누군가는 죽음을 맞이하는 자가 있기마련. 탄생과 죽음의 메타포 속에서 이 소설은 극적인 만남을 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상반된다는 것이 서로를 마주치는 순간 그 관계 속에서 마주치는 말이나 글로는 형용할 수 없는 그 무언가(something). 참으로 낯설다. 그리고 어렵다. 이 소설을 읽어 내려가면서 문득 인간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우리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사회 속에 약속인 '인간존엄성'에 대한 생각. 차마 뭐라고 표현하기도 힘들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라는 저서에서 이야기했던가.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해야만 한다'고. 그 책에서 이 말이 담고있는 명확한 의미는 어떤 누구도 파악할 수 없는 터. 왜냐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아니니까.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함부로 '죽음'에 대해서 말할 수 는 없을 것이다. 왜냐 그것은 우리가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탄생'에 대해서 논할 자격이 있는가? '탄생'에 대해서도 지극히 그 기억은 까마득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논리정연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마도 살바도르 달리라면 모르겠지만. 그는 매번 '나는 태아였을 때를 기억한다'라고 큰 소리치던 광기에 젖은 천재화가였으니까. 그렇다. '탄생'과 '죽음'이라는 현상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그것의 느낌이 어떠한지, 어떠한 구체적 경험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신뿐일 것이다.
  
  삶의 대한 모멸감., '죽음'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그 자세는 분명히 그릇된 자세일터이지만, 그닥 삶을 증오하는 사람들은 간간히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삶'의 반대어는 '죽음'이니까. 그러나 이 책에서 나와있듯 이 세상에서 '절대 믿어선 안될 것은

삶을 부정하는 인간의 나 자살할 거야. 란 떠벌림이다. 그런 인간이 가야 할 길은 알콜릭 정도가 적당하다. 삶을 인정하지 않고선 실제로 자살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랄까. 결혼을 한 인간만이 이혼을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다.(p.16)'

  스스로 세상의 의욕없이 자살을 하기위해 문을 여는 사람과 굳이 살고싶지 않은 세상사이지만 마지못해 이 세상에 자궁이라는 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의지'와 마지못해도 살아야만 한다는 '의지'와의 대결이다. 자극으로써 충동을 억제하고 의지와 의지와의 대결에서 끝까지 승리하는 것은 후자이다. 본질적으로 탄생이 없었다면 죽음 또한 맞이할 수 없을 터.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동일선상에서의 의미없는 충돌일 뿐이다. 무엇이 자명한 진리인지는 여전히 나는 모르겠다. 쩝.


살바도르 달리 『포르트 리가트의 성모』(1949)

'바다를 여자의 자궁과 동일선상에 배치한 화가에 살바도르 달리가 잇다. 영문 모를 이 세계와 자신을 구분하기 위해 시계를 엿가락처럼 늘여 빼고, 달걀에 자욱이 달라붙는 개미떼에 집착하면서 일생을 보냈던 이 화가가 소년시절의 어떤 꿈에서 바다와 어머  가 성모로, 자신이 그 태아인 성자로 사각의 요람 속에 들어앉아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어머니를 껴안았을 때의 그 충일감이 그제야 자신을 객관화시켜 준다는 사실을 섬광처럼 깨달았던 것이리라. 그것은 또 탄생과 죽음이 동일선상에 놓인다는 깨달음이기도 하다.'

  위의 간단한 단락의 글은 내가 제일 사랑하는 작가 중 한명인 이제하 선생의 글이다. 그는 바다와 여자의 자궁을 동일 선상에 배치한 화가라고 이야기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살바도르 달리는 아내인 갈라를 맹목적이고 유아적으로 사랑을 했다. 그에게 있어서 갈라는 뮤즈 그 이상의 의미였다. 그녀의 품에 안겨있는 달리는 결국 자신 또한 갈라의 자궁에서 태어난 것이며 즉, 하나의 문을 열고 이 세계에 나왔음을 상징한다. 글에서의 '아침'의 의미는 살바도르 달리의 '바다'와 같은 의미일 것이다. 그것은 모든 생명들을 깨우고 하루의 활기참을 시작하는 우리 마음 속의 잔잔한 바다와 같은 지극히 고요한 울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