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다시 찾지 않을 줄 알았던 성당에 스스로 발길을 돌렸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것은 아무도 모르겠지만. 문득 가고나서 보니 어린이 미사. 굳.
어린이 미사에 참여한건 내가 10살때. 사실 그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기억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닥 독실한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인간의 본성상 의지할 것은 신뿐이더라. 나의 족적을 끊은지 16년만에 찾았던 그 어린이 미사는 각종 깨달음을 나에게 전해준 터. 최악의 2014년 여름을 맞이하고 겪어왔던 나에게는 하나의 각성제가 되었을까. 어린이들의 목소리들이. 그곳에 울려퍼지는 사운드조차 16년째 동일하여 저절로 뱉어진 나의 순수함이였을까. 변한 것은 나의 키 뿐. 뭐 쁠러스하자면 빠진 젖살 정도?
꽤나 흥미로웠다. 단 한시간이지만 말이다. 이런 적은 없었다. 한 계절을 되돌아 본다는 것이. 그래도 그게 뭐가 되었건 스스로 특별했던 여름이였으니까. 하하.
1. 어른들은 유년시절에 대해서 스스로 기억하고 있지만 이미 어른이 된 이상 그들의 잣대로 어린이들을 구속한다. 마치 자신의 유년시절은 원래 없던 것처럼 말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어 본 사람은 느낄 것이다. 이 세상에 어린이가 '짱'이라는 것을. 여전히 시대가 지나가고 세월이 지나감에도 누군가에 대한 구속력은 현존한다. 더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없게 말이다. 희망의 빛이여. 시발.
2. 누군가 '영원'하자고 약속하는 것, 혹은 관계를 '운명'이라고 규정짓는 것을 보면 그것은 허황된 것이다. '영원'과 '운명'은 신이 그 권리를 갖고 있으며 그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자는 신의 선택만을 받은 자일 뿐이다. 인간의 잣대로 '운명'과 '영원'을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권리를 부여받고자 발버둥 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의지로 그 열망을 표출하고자 꽤나 멋지고 매혹적인 단어를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영원'과 '운명'은 이 세상에 없다. 그것은 단지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질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노력'은 단순히 열심히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말그대로 '힘쓸 노'의 '힘 력'의 의미이다. 인간이 갖고있는 '힘'의 표출인 것이다. 힘을 표출했는가? 적절하게 신의 권리를 부여받기 위해 발버둥 친 것에 불과하다. 아직도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것이 신의 영역이며, 그 어느누구도 어떠한 정도가 신의 권리를 부여받을 수 있는 지에 대해서 모른다. 이 세상의 누구도 '영원'과 '운명'을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에. 또한 '신'이라는 단어 또한 그에 버금가는 멋진 단어이다. 시발.
3. 모든 슬픔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적절한 역치값이 필요하다. 그것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며 그 역치값이 상당히 낮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좌절하고 절망한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경험력의 부족이며, 일례로 '이별'이라는 두 단어에 힘들어하는가? 결론적으로 그것은 '이별'을 경험한 자의 부질없는 찌질함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아름다운 미사여구정도로는 괜찮겠다. 그 누구보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감정의 노예가 된 것, 그 기간의 정도는 개인의 경험의 차이지만, 이러한 것조차 스스로의 역치값을 높여가는 일환이다. 자기합리화가 꽤나 멋진 단어라고 방금 든 생각이다. 시발.
4. 옛 연인에서 다시금 친구로, 꽤나 섹시한 관계라고 이야기한다. 연인보다 더욱더 섹시한 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감정적으로는 스스로의 부족함과 기껏 좆도 아닌 이기심이 그 길을 막는 것 같지만, 더욱더 생산적이고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허황된 자신감속에서 실질적인 관계를 유지해보기로 결론지었다. 연인에 있어서는 감정을 같이 공유한 관계이지만, 그 관계를 벗어나 오히려 '노력'의 일환으로 진솔한 대화를 더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 누구보다 강력하게 맺어진 '추억'의 끈을 놓치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세상(?)이 만든 암울한 장벽을 향해 함께 망치질 할 수 있는 진정한 관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섹시한 관계를 맺어본 적이 전연 있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한 번즈음은 필요하다고 느낀다. 단 한 번만. 정확히 딱 한 번만. 말이다.
일찍이 프랑스의 철학자 조르주 바티유는 에로티시즘을 일러, '불연속적인 인간의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의 한 형태'라고 말했으니까. 탯줄로 연결되어 있던 모태로부터 분리되어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인간의 삶이란 불연속성을 경험해 가는 도저한 연속의 과정이며, 모태로부터의 이탈이라는 불연속적인 경험을 통해 불가해한 세계 속에 발을 디딘 인간은, 그물처럼 촘촘히 얽혀있는 관계성을 통해 개체와 개체사이의 불연속성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니까. 그 종말에는 불연속적인 그리고 일회성만의 죽음이 남는 거니까.
괜찮은 섹시한 관계이며 에로티시즘의 발현이라고 해도 괜찮겠다. 시발.
한 시간동안 머릿 속에 정리한 것 끝. 오늘도 무사히. 무진장 글을 읽고 혹은 글을 쓰고 싶었던 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