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
<아Q정전> |
중국의 대문호 루쉰이 1921년에 발표한 단편소설로써 이 작품은 중국 한문학의 전통적 장르인 전(傳) 형식을 변형시켜 신해혁명이 일어나던 무렵의 중국 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아Q는 서구 열강의 침략 앞에 속수무책으로 남아 있던 중국인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Q는 30여 년의 생애를 통해 온갖 세상 풍파를 겪었으면서도 마지막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까지 자신의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지 않고 근거 없는 우월감이나 자기 비하로 일관함으로써 생애를 비참하게 마감한다. 그는 건달의 행패에 대해서 상황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아닌 ‘노려보기’라는 수법과 ‘정신적 승리’법을 통해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합리화 시킨다. 남에게 모욕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아Q는 상대를 평가해보고 어눌한 자 같으면 욕을 했고 힘이 약한 자 같으면 때렸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아Q가 손해를 보는 때가 많았다. 그래서 그는 차츰 방침을 바꾸어 대개는 화난 눈으로 노려보기로 했다.”
하지만, 아Q가 이렇게 노려보기 주의(主義)를 채택한 후에 웨이주앙[미장(未莊)]의 건달들은 더욱더 그를 놀려대었고, “마침내는 때리기까지 했다. 아Q는 형식상으로 패배했다. 건달들은 그제야 만족해하며 의기양양하게 돌아갔다. 아Q는 잠시 선 채로, “나는 자식에게 맞은 셈 치자. 요즘 세상은 정말 개판이야…….”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나서는 그도 만족하며 의기양양하게 돌아갔다.”라는 일종의 정신 승리법을 통해 스스로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이는 자신의 상황을 이성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채 스스로가 자위행위와 더불어 자만감에 빠진 중국인들이 모습이 곧 아Q인 것이다. 중국은 과거 세계의 중심으로 자부하며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지닌 나라였다. 그러나 당시 청나라의 쇠퇴와 외세들의 침입 그리고 중국내부의 혁명으로 인해 자멸해가고 피폐해져 있는 상태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중국인들은 여전히 예전의 명성만을 운운하며 새로운 변혁의 시대를 정상적으로 인지하지 못한 채 머물러있었다. 이로 인해, 스스로 정체성의 혼란을 일으키게 되며 그들은 더욱더 자신들의 자위행위를 확고하게 정당화 시킨다. 이러한 점에서 당시의 중국인들과 아Q를 동일시할 수 있다. 이는 당시 반식민지가 되어 있던 중국의 사회적 상태에 대한 준렬한 비판이다. 민족적 위기 속에서도 근거 없는 우월 의식, 즉, 끊임없이 놀리거나 맞으면서도 자기를 경멸하면서 위기를 벗어나고자 하는 자존심, 자신보다 약한 상대에게 힘을 과시하는 비열함, 여기저기 붙어 다니며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는 기회주의적 태도는 당시 중국인들에게 만연해 있는 자세에 대하여 루쉰은 일침을 가한 것이다.
당시 중국인들이 가졌던 생각은 비단, 당시의 중국으로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된다. 소위 ‘아무것도 없으면서 허세’를 부리는 태도, 즉 ‘허세 이데올로기’를 우리는 쉽게 관찰할 수 있다. 허세란 ‘실속없이 겉으로만 드러 보이는 기세’를 의미한다. 그 일례로 ‘없어도 있는 척’, 현실과 다른 실제의 삶이 만연해 있는 현실이 그러하다. 아무리 중고차라도 좋은 차를 타야 좋은 대우를 받고 아이들도 유행에 따른 옷과 학원 등의 소비를 해야 인정받고 무리에 낄 수 있다. 이는 타인의 시선에만 신경을 쓰고 스스로의 사고와 내실을 상실한 채, 상호의존성을 중요시여기는 대한민국 사회의 또 다른 병폐이다. 또한 보통의 나이가 많으신 어르신들의 말투에는 자연스레 ‘이것들아~ 우리 때에는 말이야’ 혹은 ‘내가 왕년에~’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물론 그들의 말에는 과거 추억에 대한 회상의 역할을 하고 어린 학생들에게 지혜와 지식을 전달해주기 위한 차원이지만 그 이면의 무의식 속에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 타성에 젖어있는 모습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국민들의 인식 속에서도 일종의 허세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나 인물에 대하여 본질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 그것에 대한 껍질, 단순히 대중매체에서 등장하는 유행, 혹은 또래집단에 만연해 있는 현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인 것이다. 이는 개인의 비판적 사고를 마비시킨다는 점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다.
과거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고 물리적 폭력을 정당화하였던 시절이 있었다. 이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즘(Nazism) 혹은 파시즘(Fascism)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물리적 폭력을 동반한 명분의 허구성은 고통을 통해 쉽게 인지된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은 쉽게 인지되지 않는다. 루쉰이 비판하고자 했던 당시의 중국인들은 그 사회에 만연해 있는 생각, 즉, 쇠퇴해가고 있는 중국이 아닌, 찬란했던 시절의 중국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허세를 정당화시키는 이데올로기 폭력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과거 독일의 나치즘의 물리적 폭력의 희생양이 되었던 유태인들 혹은 사회를 뒤덮고 있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잃어버린 당시의 중국인들, 이것은 형태만 다를 뿐 엄연한 폭력이다.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희생양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이미 윤리적인 정당성을 상실한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긴요한 것은 그들의 정신을 개조하는 일이다. 그리고 정신 개조를 잘 이룩할 수 있는 길은 문예다”라고 말한 작가의 말처럼 루쉰은 진정으로 당시의 중국 국민들이 갖고 있던 허세 이데올로기의 폭력으로부터 자국민을 진정으로 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Q로 형상화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비가시적인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촉구한 것이다.
현대 사회의 만연해 있는 여러 형태의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비판적 의식을 마비시키고 타율적 존재로 전락시킨다는 점에서 분명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다. U. 에코가 《대중의 영웅》에서 지적한 것처럼 사소한 일상생활의 영역이라도 정치화하고 탈자연화하는 의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다양하게 분산되고 은폐되어 있는 현대적 이데올로기의 특성을 고려할 때 저항보다 우선적인 것은 인식이다. 구속에 대한 인식없는 자유에의 욕망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영화 《메트릭스》의 교훈은 그 어느 때보다 현실적이다 : “진정 메트릭스를 벗어나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이 메트릭스 안에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